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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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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2022. 08. 10
下 2022. 11. 25




이런 곳에선 누구든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겠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만나기 꺼려지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런 고로... 눈이 마주치게 되면 입술을 깨물거나 억지로 웃어버리거나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거나. 그렇게 된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냅다 도망칠 수도 없기 때문에.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노미야는 대수롭지 않게 눈썹을 으쓱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야 학창 시절, 그것도 알 것 다 알고 모르고 싶던 것도 알게 되는 대학 시절에 같이 먹고 자고 울고 웃고 붙어 다녔던 후배 녀석을 다른 곳도 아니고 가정법원에서 떡하니 만나는 걸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리는 없으니까.

“오랜만이네?”
“응, 그러게?”
“여긴 웬일?”
“볼일이 있어서.”
“오. 그러셔.”
“응. 너는?”
“나야 뭐. 여기가 직장이에요.”

가만히 서 있던 니노미야는 멋대로 사쿠라이 앞에 앉더니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류를 뒤적거린다. 뭐하는 짓이냐며 냅다 뺏어들고 싶지만 과잉 반응인 것 같아 탁자 밑에 내려가 있던 손이 움찔거리다 멈추었다. 그 뒤로는 정적이다.

어쩌다 이혼을 하게 된 걸까? 사쿠라이 쇼가. 요즘엔 이혼 가지고 인생의 실패다 어떻다 하진 않지만. 그래도 생각한 대로 굴러가지 않는 삶을 조금이나마 갖게 된 이유는 궁금했다. 표독스러운 아내 등쌀을 못 이기겠어서? 반대로 아내 앞에만 가면 폭군 남편이 되어서? 어느 쪽이든 어울리기도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사쿠라이 눈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금세 서류를 전부 훑어본 남자는 고저도 별로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유가 뭐... 몽유병 그런 게 있었어?”
“살다 보니까 생기더라고.”
“이런 걸로도 헤어지는구나.”
“보통이라면 안 그렇겠지.”

탁자 밑에서 멈춘 손이 쭉 펴졌다가 다시 동그랗게 말렸다. 십 년만에 만난 녀석에게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떠벌리고 싶진 않았지만 여기가 직장이라면 잔뼈가 적잖이 굵을 테니 숨기려고 해 봤자 숨겨지지도 않을 테다. 니노미야는 또 금방 흥미가 떨어진 듯 자신이 어지른 서류를 정리하고는 멋대로 인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사쿠라이는 멍하니 앉아 있다 서류봉투를 가방에 쑤셔넣었다. 남의 일로 와 놓고 본인 서류를 들고 있던 자신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부가 동반 출석해야 했으므로 그날은 기상도 함께였고 준비도 함께였다. 늘 둘 중 누군가가 먼저 나가게 되는 근무 환경이었기 때문에 결혼한 이래로 이런 적은 드물었다. 차는 두 대가 있어서 누구 차를 탈지 잠깐 머뭇거렸다가 법원에서 직장이 먼 쪽의 차를 타기로 했다. 사쿠라이의 남편이 먼저 조수석으로 몸을 틀어 벨트를 채워 줬다. 나도 손 있는데. 그 말에 남편은 하하 하고 웃기만 했다. 안전벨트가 딸깍하고 물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나자 바퀴가 부드럽게 구르기 시작했다.

손잡을까? 남편이 그렇게 물었다. 법원 계단 앞에서. 왜? 했더니 작게 웃으며 마지막이잖아, 라고 대답했다.

긴장해서 손이 축축해졌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먼저 내민 손을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꽉 쥐었다. 어디서 놓을지는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놓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가정법원에 들어오면서 손을 붙잡고 들어오는 부부라니. 내심 드문 일이 아니기를 원했지만 그럴 리 만무했다.

그래도 먼저 놓기는 싫었다. 말마따나 마지막이니까. 앞으로는 이 손을 잡아 보고 싶어도 마땅한 핑계가 없을 거니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속으로는 혹시 또 니노미야를 만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류를 받아 나오는 동안 니노미야는 만날 수 없었다. 

남편과는 아이도 없었고, 각자 직장도 있었고, 가족의 반대라든가 하는 건 없었기 때문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협의하고 재산 분할도 간단했고 순식간에 이별할 수 있었다. 한 가족이 단숨에 반토막났다.

 이 집은 네 명의니까 내가 나갈게. 가구는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니 취향이라 내가 가져가도 톤이 안 맞을 거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깝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쓰는 게 좋잖아. 그렇지?

3년하고도 반년 정도를 둘이서 쓰던 집이었는데 한 사람분의 짐이 하루아침에 빠지자 무서울 정도로 빈 구석이 많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텅 비게 된 것도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쿠라이는 일이 없는 주말에 청소기를 돌리며 전 남편의 그 말을 생각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하게도 가정법원에 들락거리는 일이 늘었다. 

이혼 전적 있는 변호사라는 말은 이혼 전문 변호사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어디서 자기 몰래 소문이라도 난 건지 들어오는 일들이 족족 이혼 사건이었다. 회사 측에서 이런 사건만 자기 앞으로 돌리는 건 아닌가 싶어 사무장에게 몰래 물었지만 요새 들어오는 일들은 전부 지명해서 들어오는 사건이라고 했다.

심지어 본인은 협의 이혼이라 법정까지는 가지도 않았는데 확인하는 사건들은 죄다 복잡하고 애매해서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러니 가정법원이 일터라는 후배의 얼굴을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곤란하게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니노미야의 눈은 먼저 재빠르게 왼손을 훑었다.

“끝났어요?”
“응. 너 없더라.”
“저번 주에 내내 출장이었거든.”

2층 로비에서 기분 나쁠 정도로 배실배실 웃으며 자신을 반긴 니노미야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판기 옆의 소파를 가리켰다. 시키는 대로 사쿠라이가 거기 앉자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은 니노미야는 버튼을 누르고 먼저 튀어나온 종이컵을 꺼내 건넸다. 본인 몫까지 나오자 그제야 니노미야도 자리에 앉았다.

“저번 주에 왔었어.”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좀 궁금했는데. 아쉽게 됐어요.”
“넌 뭐 그런 걸 궁금해하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오늘은 왜 왔어요?”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소파에 앉아 커피인지 핫초코인지를 홀짝이는 니노미야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 옆의 사쿠라이를 힐끔댔다. 사쿠라이는 이미 그 시선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역시 기억하는구나. 종이컵의 동그랗게 말린 부분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니노미야는 그 인사들에 대충 대답했지만 어쩐지 저 눈들이 옆으로 돌아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일하러 왔어.”
“미안할 게 뭐 있나. 회사는 여기 근처?”
“응. 별로 안 멀어.”

역시, 지나가며 이쪽을 흘끔대는 사람들은 저번주의 그 이상한 부부를 기억하는 게 틀림없다. 끝내러 오는 길을 손 붙잡고 애틋하게 걸어오는 부부를.

“아하. 근데 선배 여기서 무슨 짓 했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아니, 별로. 그냥 서류 잘 받고 갔어.”
“이상하네. 이 사람들 하루에도 질리게 보는 게 이혼하러 오는 사람들인데 왜 선배를 기억할까? 특이한 거 아니면 기억하기도 어려워요. 근데 난 선배 같은 사람 얘기는 밥 먹으면서도 들은 적이 없단 말이지.”

항상 생각하지만 눈치가 너무 빠른 사람은 이래서 무섭다. 그래서 꼭 니노미야에게만은 들키기 싫었는지도. 곧이곧대로 말하기 싫은 마음이 커지자 손이 저절로 무릎께를 쓰다듬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다.

“울었어요? 그런 사람은 그래도 생각보다 꽤 있는데. 아니, 은근 많아요. 분에 겨워서라도 울더라구. 그럼 소리라도 지른 건가? 뭐 따지자면 이런 사람이 아닌 사람보다는 많지만. 남편이 펑크? 금방 끝난 거 보면 그럴 확률은 적겠죠. 그땐 반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으니까. 뭔데요? 뭐 했길래 사람들이 막 훔쳐보고 지나갈까? 응?”
“너 여기서 계속 이렇게 농땡이 피워도 돼? 나 얼른 가 봐야 해서.”

다 마신 종이컵을 콱 구겨 쥔 사쿠라이가 내려뒀던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럼 끝나고 밥이나 같이 먹어요. 나 오늘 잔업 없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사쿠라이를 빤히 올려다보며 니노미야가 말했다. 넌 말이지… 달라진 게 없구나. 사쿠라이가 한숨을 터트렸다.

“내가 너랑 왜 밥을 같이 먹어.”
“못 먹을 것도 없잖아?”
“그럴 사이인가?”
“나 섭섭해요.”
“시간 보고.”
“연락할게요.”
“그렇게 하든지.”

누가 봐도 빨리 털고 자리를 뜨고 싶은 사람의 대꾸였으나 니노미야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사쿠라이의 자켓 주머니로 손을 냅다 쑤셔넣고는 체온으로 조금 뜨끈해진 핸드폰을 꺼냈다. 멍청하게 서 있는 사쿠라이의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잠금을 풀어버린 니노미야는 금세 자신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

“저장해요. 이따 연락했는데 누구세요 이러면 나 속상하다?”

그러더니 화면에 통화 목록을 띄운 채로 핸드폰을 사쿠라이의 손에 턱하니 쥐어주는 것이었다.

“갈게. 일해, 놀지 말고.”

사쿠라이는 농락당한 기분에 자기 손을 쥐고 있던 니노미야를 내치고는 중앙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에 사쿠라이의 발소리가 탁탁탁 하고 울린다. 내쳐진 손을 멀거니 내려다본 니노미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동전이 경쾌하게 짤랑거린다.

오늘치 할 일을 다 끝내고 갈 준비가 한창인데 귀신같이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안 봐도 뻔했다. 울컥하는 마음에 확 수신 차단을 해 버릴까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한 후배를 그렇게 대하는 것도 영 껄끄러워 벨소리가 끊기기 전에서야 겨우 전화를 받았다.

“왜?”
“왜냐니? 밥 먹자고 했으니까 전화를 했죠.”
“너 일 끝났어?”
“그럼요. 지금쯤 선배도 끝났을 것 같아서 전화했는데 아직 일하는 중인가? 얼마나 걸려?”

오늘 같은 기분으로는 집에 가서 일거리를 뒤적여도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습관적으로 서류철을 가방에 집어넣고 지갑이라든가 차키라든가 하는 것들을 챙기면서, 사쿠라이는 솔직히 말한 다음 밥 한 번 먹고 털어버릴지, 아니면 거짓말로 약속을 계속 미루다 없애 버릴지 고민했다.

“일 끝났지? 다 알아. 내가 쏠 테니까 튕기지 말고 나오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안 끝났다고 하면 어쩌려고? 내 야근 계획 망치면 책임지게?”

얼굴과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로 사무실 문을 잠근 사쿠라이가 열쇠를 가방에 집어넣고 다시 핸드폰을 손으로 잡으면서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진 곳에 인사하는 동안 니노미야는 수화기 너머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에이. 정 급하면 밥 먹고도 회사 돌아갈 사람인 거 내가 다 알거든요? 문자로 주소 보낼 테니까 거기로 와. 알겠지? 노쇼 하면 나 혼자 밥 먹는 거다?”
“그래, 알겠어. 너 지금 나 협박하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 이제 갈 테니 주소 좀 확인하게 전화나 끊으라고 소리친 뒤에서야 핸드폰이 조용해졌다.

일터에서 내내 하는 게 남들 얘기를 듣고, 그걸 정리해서 앞뒤를 끼워맞추고, 울거나 화내며 부탁하는 사람들을 달래가며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끌어내는 노동일 뿐인데. 퇴근해서도 누군가와 얘기하러 가야 한다니. 문자 속 주소는 그닥 멀지 않았다. 창가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기댔다. 이런 일들만 잔뜩 들어오는 와중에 그렇게 환영할 수도 냉대할 수도 없는 절친했던 후배와 만나다니. 

어쩐지 속이 시끄러웠다.

만약 약속 장소가 지금보다 더 데시벨이 컸다면 면전에 잔뜩 짜증을 내고 다시 운전해 되돌아갔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니노미야는 정말이지 이런 데에선 나무랄 곳 없이 센스 있다고도.

“내일 쉬는 날이에요?”
“토요일이니까 일단은 쉬겠지. 뭐.”
“오, 다행이다. 안 마신다고 할까 봐 걱정했거든.”

십 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인데도 니노미야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자리를 가리켰다. 매몰차지도 다정하지도 못한 태도를 어쩔 줄 모르는 건 되려 사쿠라이 쪽이었다. 지금처럼 무정하게 마주보기엔 가슴 안쪽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고 이제 와서 예전처럼 살갑게 구는 것도 이상해 보일 테니까. 

어쩌자고 아는 척하는 건지 예상도 안 되고. 시킨 대로 자리에 앉아 간단하게 주문을 마치자 그제야 눈앞의 빈 잔 하나가 눈에 띄었다.

“먼저 마셨어?”
“말하는 거 들으니까 뭐,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왔으니까 됐지만.”
“나 거짓말은 안 해.”
“말 안 하는 건 있잖아요.”
“다 말해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

간단히 말하자면 스트레스 누적으로 예민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니노미야는 적당히 긁고 적당히 달래 주는 데 도가 텄으니까, 그 앞에서까지 정신을 붙잡기는 누구라도 힘들 것이다. 장담한다. 잔이 계속 꺾였다. 말하기 싫다고 했더니 알겠다며 잔이 비워질 때마다 채워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마셨던 게 언제더라? 전 남편은 골초지만 음주는 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템포가 빠르네.”
“나도 알어.”
“급하게 마시면 내가 데려다 줘야 되니까 그러지.”

이미 세 병이나 다 비우고 넷째 병도 바닥을 향해 갈 쯤이었다. 사쿠라이가 그제야 주머니를 뒤져 차키를 만졌다. 

“가려고?”

대답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니노미야가 상을 짚고 얼굴을 뻗어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신을 꽉 쥐고 있던 게 술이 들어가자 풀리다 못해 날아가버렸는지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해졌다.

십 년만에 만나 놓고 반가운 기색 하나 없는 게 괘씸해서 좀 골려주려고 했을 뿐이다. 물론 재회 장소가 장소니만큼 쌍수 들고 반길 리 없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런 꼴을 마주하니 속이 꼬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좀 많이 먹이려고 한 건 사실. 그렇다고 말 한마디 없이 마시기만 할 줄은 몰랐다. 그냥 좀 굳은 태도만 어떻게 풀어 보려고 한 건데.

그나마 취하면 입 다물고 가만히 멈추는 주사는 변하지 않았는지 고개가 바닥을 향해 꺾인 뒤로는 간간이 꾸벅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하니 이렇게 말이 없던 것도 아닌 것 같다. 

짐을 챙기고 계산도 끝내고 사람도 어깨에 걸쳤는데 생각해 보니 차가 문제였다.

흠. 어쩔 수 없지. 내일 걸어서 출근하라고 하지 뭐. 차는 술 깨고 가져가라고 하면 되고. 문제는 집에 어떻게 데려다주냐는 건데.

“선배 화났어요?”

도리도리

“나 싫어요?”

도리도리

“그럼 뭐. 왜 말을 안 해? 집 어디에요? 택시 부르면 택시 아저씨한테는 말해야 된다?”

이젠 고개도 안 움직인다. 니노미야는 그나마 다리라도 움직여주는 걸 위안 삼고 길가로 나와 손을 휘적거렸다. 택시 아저씨가 부드럽게 코앞에 차를 대고 문을 열었다. 어깨 위로 올려둔 팔을 풀어내고 물먹은 아니 술먹은 몸을 뒷좌석에 어떻게든 집어넣는다. 삐져나온 다리를 자기 다리로 밀어넣고 옆자리를 사수했다.

“주소, 주소 불러요.”

응급실에서 환자 의식 확인하듯 사쿠라이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렇게 요청한다. 다행히 사쿠라이는 인사불성으로 취해 길바닥에 버려져도 집구석은 잘 찾아가게 설계되어 있는 귀소본능 충실한 인간이었으므로 자동응답기처럼 집 주소를 내뱉는다.

택시가 멈췄던 것처럼 부드럽게 출발한다. 얼마 안 있어 제정신인 취객과 제정신 아닌 취객을 차례대로 뱉어낸다. 다시 사쿠라이의 팔을 어깨 위로 올리고 공동현관으로 향했다가 발걸음이 멈춘다. 

“몇 호?”

아까 먹인 게 술이 아니고 풀이었는지 아직도 입이 꾹 닫혀 있다. 대신 어깨 위로 올라오지 않은 팔을 뻗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문이 열리자 다리가 착실하게 움직여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늦은 시간에는 항상 1층에 내려와 있는 기본 세팅에 니노미야는 감사하게 된다. 사쿠라이는 푸 하고 알코올 냄새가 반은 넘게 섞인 숨을 뱉고 층수를 누른다. 17층.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에 걸어나간 둘은 잠시 그 앞에 가만히 멈춘다. 

“왼쪽 오른쪽?”

사쿠라이의 왼쪽에 기대고 있는 니노미야의 몸이 오른쪽으로 휜다. 

“말로 하면 안 될까? 난 그게 경제적인 것 같애....”

니노미야는 현관문 앞에 선 뒤 남는 손으로 사쿠라이의 바지 주머니를 훑는다. 차키에 도어락 태그가 걸려 있다. 삐로록 하고 도어락은 열린다. 구두를 벗기고 중문을 열고 안방을 찾아 사쿠라이를 던져 눕힌다. 조용하고 그 사이에는 숨소리만 조금 크게 들린다. 자켓을 벗기고 넥타이를 푸르고 셔츠도 벗길까 고민한다. 이왕 집에 데려다 놓는 거 편하게 눕히자고, 벨트도 푸르고 셔츠도 벗긴다. 

침대에 온몸을 맡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든다. 니노미야는 아무 의자나 끌어다 침대 앞에 가져다 두고 한참을 앉아 있는다. 저렇게 가만히 자다가 벌떡 일어나 돌아다닌다는 게 신기해서. 구경이나 해 볼까 하는 마음에. 십 년의 부재 사이에 어떤 게 그대로고 어떤 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그래도 말이지. 제법 귀여움받는 후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차가운 태도라니 내심 상처라도 입은 기분이라. 

더 나아가서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결혼한 지 3년. 연애 기간은 알 수 없지만 길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몽유병이라니. 그런 게 삶에 불쑥 튀어나올 수가 있나. 또 같이 학교에 다닌 시절을 되짚어 봐도 과방에서 자던 중에 일어나 돌아다녔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었다. 어릴 적 얘기를 할 때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그럼 그 십 년간 생겼다는 건데 영문을 알고 싶었다.

“나라면 이혼 안 해요.”

나라면 헤어지지 않아요. 나라면 이혼해 달라고 해도 안 해 줘요. 나라면 오히려 즐거울 걸요. 그런 사람이랑 사는 거. 결혼한 사람을 끌어안고 살게 되는 거.

니노미야는 뜬눈으로 동이 틀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취해서인지 잠이 깊어서인지 사쿠라이는 돌아다니기는커녕 일어나지도 않았다. [차는 식당에 그대로 있음]이라는 문자를 보낸 다음 뒤돌아 나섰다.

반지 자국도 남지 않은 결혼생활을 멋대로 상상하면서.











왜 결혼했었냐고 묻는다면 잘해줘서라고 대답하겠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깔끔하고 담백하고 질척거리지 않아서 좋아했다. 주변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 엉겨붙는 날들에 신물이 나서.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좋아해준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좋아하고 좋아하니까 결혼했지. 혼자서는 결혼할 수 없으니까. 연애하고 상견례하고 결혼하고 같이 살았다. 그린 듯한 표준의 길이라 별일 없으면 이대로 평생 살 거라는 생각도 했다.

별일이 생겼지만. 나에게.

잠든 채로 걸어다닌 때의 기억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침대에서 일어난 날, 남편은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해가 뜨고 나서도 이 일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냥 나를 다시 데려다 눕히고 끌어안아 잠들었다. 나는 아침에 왜 그런 자세로 잠들어 있었는지 몰랐지만 추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면 이후에 기립해 돌아다니는 일을 일주일 정도 빠짐없이 하게 되자 남편이 저녁을 다 먹고 소파에 앉아 얘기했다. 너 밤에 돌아다녀. 그 말을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밤에 돌아다녀? 응. 물어보면 대답도 해. 내가 그랬어? 응. 너는 기억 못하지? 기억할 리가 없었다.

병원 가봐.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나도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해야 하는데 매번 너 언제 깨서 돌아다닐지 지켜보는 건 힘들어.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병원에 간 적은 없었다. 그렇게 말했지만 거의 세달동안 남편은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하고 다크서클이 짙어지고 일찍 잠드는 남편을 볼수록 미안한 마음은 컸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한번 방 문이 아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난 이후로 남편은 어디서 수면제를 타 와 내밀었다. 먹고 자. 눈에 실핏줄이 있는 대로 터지고 까칠해진 피부를 한 채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약통을 내미는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한 알이 두 알이 되고 두 알이 다섯 알이 되고 결국엔 한 통을 다 비웠지만 저절로 괜찮아지지 않았다. 언제 자다가 일어나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배우자를 두고 자기 혼자 밖에서 편하게 자는 걸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 더 힘들어했다. 약이 다 떨어지자 그제야 제발로 병원에 가 볼 생각이 들었지만 처방전보다 먼저 내밀어진 건 이혼서류였다.

미안해, 넌 아픈 건데 헤어지자고 해서. 그런데 나도 이젠 안 되겠어. 

여태껏 참아온 쪽이 대단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물고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우습게도 이혼하자마자 없었던 일이라는 듯 밤중에 일어나 돌아다니지 않게 됐다. 그럼 남편이 원인이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큰 침대를 굳이 버리고 작은 침대를 새로 살 낭비를 할 생각은 들지 않아 넓은 침대 가운데로 베개를 옮기기야 했지만 허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건 섭리라고 여겼다. 인간이라면 있던 게 사라졌을 때 더욱 허전해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그래도 정말 밤에 잠든 채 걸어다니는 일이 더 일어나지 않는 건지는 사실 알 수 없었다. 혼자였기 때문에. 뭐라도 설치해 놓고 영상을 찍어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겠지만 막상 자기 두 눈으로 알게 되는 건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그러지 않겠거니 어림짐작했다.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봐도 잠들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매일매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 같다.

*


비가 갑자기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근래에 본 적 없는 매서운 빗줄기가 세상을 때리는 중이었다. 열어둔 창문이 있는지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늦은 시간에 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인터폰을 확인하니 니노미야였다. 그 작은 화면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푹 젖어 있었다.

“누구세요?”
“나야. 문 좀.”

나라고 하면 어떻게 아냐?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모르기도 어려웠다. 현관문을 열어주자 니노미야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무슨 일이야? 우산 없어?”
“응. 우산이 없었어.”
“왜 집으로 안 가고.”

가방을 바닥에 대충 기대 세워 두니 금방 물이 고였다. 불청객이 가만히 서 있는 자리에도 웅덩이가 조금씩 부피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선배네 집이 더 가까웠어.”
“비 안 그칠 것 같은데. 자고 가.”
“응, 고마워. 선배밖에 없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은 채로 니노미야는 욕실에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렸다. 젖은 옷은 건조기에 돌려버렸다. 사쿠라이가 꺼내준 옷을 입고 안방을 들여다보더니 거실로 나와 말했다.

“소파에서 잘게.”
“그냥 침대에서 자. 원래 둘이 자던 거야.”
“선배 불편할까 봐 그러지.”
“별로.”

잘 자. 불을 다 끄고 인사하자 똑같은 말이 돌아왔다. 옆자리가 푹 꺼지는 느낌이 났다. 금세 잠들었다. 니노미야는 잠들지 않았다. 잠들 수가 없었다. 저번에 봤을 땐 해가 떠가도 일어나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오늘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고 평범하게 잠에 들었으니까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래도 말 없이 어두운 방에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으려니 잠은 몰려왔다.

달칵. 드르륵.

이러니저러니해도 남의 집인 탓에 얕게 잠든 니노미야가 창문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선배.”

불도 하나 켜지 않은 채로 사쿠라이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비가 아직 한참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들이쳐 사쿠라이의 얼굴과 가슴팍이 점점 젖어갔다.

“선배. 비 와요. 창문은 왜?”

그렇게 말하며 니노미야 자신도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가만히 선 사쿠라이 대신 열린 창문을 다시 닫고 잠금장치까지 걸었는데도 대꾸가 없었다. 빗줄기를 등지고 사쿠라이를 돌아보자 어렴풋이 전 남편이 이해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알게 됐으니 만족스러운걸? 잠든 채로 서 있는 사쿠라이를 침대로 데려와 눕혔지만 니노미야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또 일어나 돌아다닐지 몰랐기 때문에. 해가 뜰 때까지 사쿠라이를 쳐다봤지만 그런 일은 두 번 일어나지 않았다.

다 마른 자기 옷을 입고 일찌감치 나선 니노미야는 집에 들렀다 출근했는지 다른 정장차림으로 와인 한 병을 든 채 현관에 서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걸 받아준 답례라면서 내밀었다. 야근 안 한 게 어디에요. 나는 선배가 안 오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껏 찾아와 기다린 사람을 이제 됐으니 가라고 문앞에서 돌려보낼 성격이 못 되는 사쿠라이는 그 와인 한 병과 니노미야를 같이 집에 들였다. 한잔씩 나눠 마셨는데 웬일인지 니노미야가 먼저 소파에서 잠들었다. 한 잔이라지만 술도 마셨고 잠들기도 한 사람을 깨워서 또 돌려보낼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사쿠라이는 담요를 덮어주었다.

“병원은 가 봤어요?”
“무슨 병원?”
“몽유병은 병 아닌가?”
“이제 혼자 사는데 뭐.”
“혼자 있으니까 더 가야지. 언제 어떻게 될 줄 알고.”
“너 나 겁주는 거야?”
“혹시 모르잖아요.”
“알아서 할게. 심한지도 모르겠고.. 다친 적도 없거든.”
“다치고 가면 무슨 소용이래.”

숟가락을 들다 말고 그렇게 물었다. 대답하는 걸 보니 갈 생각은 한 적이 없구나 싶다. 했더라도 이혼한 뒤에는 다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말이 틀린가? 큰일 나기 전에 가보시죠. 사쿠라이는 듣는 둥 마는 둥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 니노미야는 자기 집보다 사쿠라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냥 있다 가는 게 아니고 이젠 아예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들고 와서 매번 자고 갔다. 칫솔을 놓고 갔다느니 양말을 두고 갔다느니 갖은 핑계를 대고 머리를 들이밀다가 이젠 그런 쉬운 핑계조차도 대지 않고 맘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너네 집 좀 가라. 여기가 니 집이야?”
“안 될 것도 없지?”
“집세 안 아깝니? 나라면 아까워서라도 집에 가겠다.”
“싸게 구한 집이라 별로.”
“너 내가 이혼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어쩌긴요? 다시 만나지도 않았겠지.”

가정법원에서 일하며 보는 수많은 서류들. 은행 업무를 보듯 이혼하는 사람들.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천차만별의 사유들. 니노미야는 그걸 보면서 맘대로 이정도면 헤어진다 이정도면 같이 산다 판단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결과를 놓고 보면 법원과는 영 잘 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쿠라이가 밤마다 일어나 돌아다니는 걸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니노미야로서는 그쪽이 만족스러울지도 모르겠다. 

*

또 비가 쏟아진다. 도로를 도시를 쓸어갈 것처럼. 사쿠라이는 생각한다. 그 맹랑한 녀석을.

우산이 없으면 우산을 사든지. 집이 멀면 택시라도 타든지. 직장이랑 가깝다고 비를 다 맞고 와서는 남의 집에 대뜸 얼굴부터 들이대는 사람이라니.

오늘은 우산 들고 갔으려나. 그런 생각에까지 도착한다. 

조금 많이 마셨나 싶어서 눈앞의 와인병과 잔을 바라본다. 두 개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취하지 않았다.

그때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인가 하고 보면 니노미야다. 신기한 애라고, 또 생각하게 만든다.

항상 때맞춰 눈앞에 등뒤에 나타나는 건.

어쩌면…

수화기를 켜지 않고 공동현관을 열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와서 다시 초인종을 누르기까지는 시간이 있다. 저번에 꺼내 줬던 것들을 죄 다시 쏟아낼 심산으로 방에 들어간다.

문을 열자마자 그때처럼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현관에 들어선 니노미야는.

어쩐지… 외로운 얼굴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얼굴이 붙잡혔다. 니노미야가 입을 맞춰왔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얼굴을 간지럽혔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 사쿠라이를 뒤로 밀었다. 탁자에 부딪혀 잔이 쓰러졌다.

“… 깨졌어?”
“아니.”
“그냥 둬. 내가 치울게.”

어깨 너머로 탁자를 흘긋 쳐다본 니노미야는 이제 자켓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두었다. 다시 고개가 끌려갔다. 힘에 밀려 코가 눌렸다.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입술이 깨물렸다. 그러는 와중에 계속 니노미야는 사쿠라이를 붙잡고 밀어댔다. 뒷걸음질은 사쿠라이가 벽에 머리를 기대고 나서야 멈췄다. 비를 맞아 몸이 차가웠는데 입 안은 반대였다. 혀가 볼 안쪽을 만지고 입천장을 건드리고 자신의 혀를 괴롭혔다. 사쿠라이는 몰래 몸을 떨었다. 방금 전까지 노곤하게 앉아 있다 이제서야 알코올이 피를 따라 도는 느낌에 니노미야의 리드대로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머리가 멈춘다. 잠깐잠깐 떨어질 때마다 코끝과 아랫입술과 턱 근처에 느껴지는 숨이 뜨거웠다. 불현듯 손이 다가와 바지춤을 붙들었다. 사쿠라이는 재빨리 그 손을 움켜쥐었다. 허리를 살짝 빼고 있던 니노미야가 올려다보았다.

안 된다고. 움켜쥔 손에 힘을 줬지만 니노미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왜요?”
“안 된다니까.”
“안 서서?“
“무슨! 그런 거 아냐. 암튼. 안 돼. 그만하자.”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그만해요.”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순간 힘이 풀려 벽에서 미끄러졌다. 니노미야가 붙잡아 다시 추켜세우며 바지 고무줄과 속옷 끄트머리를 같이 쥐었다. 차마 막기 전에 먼저 바지가 끌려내려갔다. 바지춤을 쥐었던 손이 사쿠라이의 성기로 옮겨갔다. 미끄러졌던 등에 힘이 들어간다. 그 상태로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에게 키스했다. 숨이 막혀 가슴팍이 들썩일 때가 되어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흘러내린 침방울을 혀로 훑은 니노미야가 성기를 향해 침을 주륵 흘렸다. 낯선 느낌. 벽에 사쿠라이를 몰아붙여놓고 이젠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동시에 벨트를 푸르는 소리가 찰칵찰칵 들려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에 열이 올랐다. 생각이 잘 되지 않는다. 아까부터 벌어진 입에서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져나왔다. 벨트는 풀어져 바닥 어딘가로 떨어졌고 사쿠라이의 성기 끝에 물이 맺혀갔다. 힘을 준 탓에 목에 핏대가 섰다. 그쯤 되자 니노미야가 자기 것을 갖다대고는 비벼대기 시작했다. 마찰되는 느낌이 아득했다. 

한번 뺐는데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따져물으려는데 그것보다 전에 먼저 몸이 움직여졌다. 니노미야가 침대로 사쿠라이를 밀어넣었다. 

“콘돔 있어?”
“있어.”
“어디?”
“마지막.”
“쓸 일이 있었나 봐?”
“야.”

손을 뻗어 니노미야의 멱살을 쥐고 확 끌어당겼다. 끌어당겨진 니노미야는 눈썹을 으쓱였다.

“응?”
“너 이거 벗어. 차가워.”
“응.”

아직도 혼자 다 젖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사쿠라이는 손을 놓고 가까이 당겨진 니노미야의 가슴팍을 밀었다.

셔츠를 벗어 바닥 아무데나 던진 니노미야는 사쿠라이가 더 얘기하지 못하게 계속 입맞췄다. 그러면서 손을 서랍 마지막 칸에 가져갔다. 한 박스에 네 장. 열어 보니 세 장뿐이었다. 이런 데에 묻어 있는 생활감. 생활감이라고 해야 하나?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슴팍과 목덜미에도 타액을 묻혀가며 뒤를 풀어주는 와중에도 사쿠라이는 자꾸 고개를 돌리거나 어디론가 벗어나려고 움찔거렸다.

“나랑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 좀... 처음도 아니면서.”
“너 미쳤어?”
“안 미쳤으니까 힘 풀고 화도 푸세요.”

뒤통수가 니노미야의 손에 받쳐지면서, 니노미야와 키스하면서, 눈을 감고는, 어쩐지 전 남편을 생각했다. 몸이 아주 천천히 눕혀지는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이렇게 하지 않았지. 풍선이 부피를 키우듯 생각도 점점 불어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스울 만큼 몸은 착실히 반응해갔다. 그 사람은 말야. 이런 식으로 침범해오지 않았어. 여기까지 발을 딛지 않았어. 이렇게는 하지 않았어…. 생각의 끝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니노미야, 넌 있지. 넌 늘 이런 식이야. 너도 알지?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쑥 들어와 펀치를 날리고 정신 차리기 전에 한걸음 빠져놓고, 그렇게 생긴 구멍을 멋대로 메우더니 그 위에 올라서버리면, 이건 진짜 못된 심보다, 그런 생각이 들잖아. 그러면서 막상 얼굴을 보면 그만해라 나가라 그런 건 말하기 어려워지는. 그런. 너는. 넌…….

*


그 뒤로도 사쿠라이의 집에서 보내는 날은 하루하루 늘어갔다. 대개 니노미야가 먼저 잠자리에 들면 이어서 사쿠라이가 수면을 취했다. 그러다가 잠결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 니노미야가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사쿠라이를 데려다 다시 눕히고 잠들었다. 

침실 안에서만 돌아다니는 정도는 괜찮았다. 창문 여는 것도 좀 추웠지만 큰일 날 일도 아니었다. 거실에서 걸어다니다 탁자에 허벅지가 부딪혀 다음날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사쿠라이는 괜히 니노미야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기나 했다. 아니 나 아니라고 자기가 부딪힌거라고.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그치만 부엌에서 발견될 때는 좀 무서웠다. 아무리 요리와 거리가 멀다 해도 사람 사는 집인 이상 기본적인 조리도구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은 언제 갑자기 흉기로 변할지 몰랐다. 선 채로 잠든 사쿠라이를 달래 데리고 돌아오면서 듣고 있는지 기억할런지도 모르지만 니노미야는 부엌에는 가지 말라고 속삭였다.

무의식이 알아들었는지 그뒤로 부엌에선 보이지 않았다. 정신차리면 솔직히 욕실도 무서웠다. 분명 처음엔 몽유병이라는 게 신기해서, 어떻게 돌아다니길래 전 남편이 참다 못해 헤어지자고 했는지 궁금해서 단지 흥미 본위로 이 집에 찾아왔고, 그러고 나선 나름 찾아서 데려오는 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을 만족시켜주는 듯한 기분에 계속 지켜봤을 뿐인데.

그런데 이젠 자다 깨는 게 무서웠다. 맘대로 생각해서 미안하지만 전 남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수면제까지 받아다 줬으면서 못 참고 이 집을 나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침대에 눕기는 했지만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아서 사쿠라이가 일어날 때까지 뜬눈으로 기다렸다. 니노미야는 깨어 있는 채로 사쿠라이가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건 그때 그렇게 취했던 날 다음으로 처음인 걸 기억해냈다. 조금 지켜보다가 다시 데려와야지. 그리고 아침에 같이 병원에 가자고 해야겠다.

따지자면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사쿠라이가 이젠 거실로 나갔다. 침실에서 거실은 바로 보이지 않아서 니노미야도 따라 일어났다. 그냥 거실에서 멈춘다면 좋았을걸. 사쿠라이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밖에 나갔다. 하다못해 거기서라도 멈췄으면 좋았을걸. 멈추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난간을 쥐는 걸 보자마자 니노미야가 뛰쳐나가 사쿠라이를 끌어당겼다.

조금만 늦었으면 둘 중 하나든 둘 다든 떨어질 뻔했다. 베란다에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진 사쿠라이는 그제야 잠에서 깬 듯했다.

“너... 아니 우리... 왜 여기 있어?”
“선배 몽유병 하나도 안 나았다. 오히려 심한데 이거는.”
“무슨 소리야? 니가 나 넘어트렸어?”

사쿠라이가 어딘가에 긁혀 핏방울이 맺히는 팔뚝을 살펴보면서 그렇게 얘기했다.

“있지. 선배가 뛰어내리려고 하면 내가 잡아줄게. 만약 떨어지면 나도 같이 떨어질게..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거 하지 마. 내가.. 내가 끌어당겨줄게. 그러면 되잖아. 나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니노미야가 소리쳤다. 울대가 파르르 떨렸다. 사쿠라이를 끌어당겼던 손은 아직도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사쿠라이도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들어야 이 충동이 멈추는지. 무의식이 움직이는 발걸음을 그만두게 하는지. 그건 네가 밤에 움직인다, 병원에 가라, 약을 먹고 자라, 하는 말들은 아니었다. 함께해주겠단 말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붙잡는 손은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 헤어지기 싫어서 잡아당기는 손을 맞잡고 나서야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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