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equence

가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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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3. 05.







새벽 두시가 막 되기 몇 분 전.

깜빡 잊고 소리를 켜둔 휴대폰이 조용히 울었다. 여론조사라거나 보험권유라면 받지 않아야지, 이 시간이라면 그저 그런 스팸전화려나, 생각하며 액정을 쳐다보았을 때 사위가 너무나도 고요해서 마치 십년 전쯤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지우지 않은 연락처.

“여보세요.”

“응. 지금 뭐해.”

“자려구요.”

“얼굴 좀 보자. 내려와.”

“지금?”

“응. 밑에 있어.”

베란다로 가 흘끗 밑을 내려다보자 가로등 불빛이 약해 제대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 끝에 작게 빛나는 담뱃불이 신원을 보장해주었다. 

겉옷만 챙겨입고 지갑과 열쇠, 휴대폰만 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느리게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차마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으로 내려가니 틀림없는 그 사람이었다.

검은 서류 가방에 감색 코트 차림인 사쿠라이는 달랑 가디건 하나뿐인 니노미야를 훑어보더니 손에 쥐고 있던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잠깐 보자더니, 괜찮아요, 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억세게 붙잡힌 끄트머리를 풀러낼 수 없었다.

“담배 냄새 안 뱄어.”

한잔 하자며 데리고 들어간 가게는 니노미야도 잘 아는 곳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니노미야를 아는 직원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사쿠라이의 머플러를 풀러 접어두는 동안 사쿠라이는 먼저 멋대로 맥주와 안주들을 시켰다. 시간이 늦었는데 가게는 조용한 구석이 없었지만 단지 이 자리만큼은 마치 진공인 것처럼 소리가 멎었다.

“참 제멋대로네요.”

“응?”

“사쿠라이군 얘기.”

“알아, 나도.”

맥주 한 잔씩과 안주들은 어색할 시간도 만들어주지 않을 셈인지 금세 자리에 나왔다. 사쿠라이가 먼저 반잔씩이나 들이켰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코트는 얌전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넥타이가 살짝 풀어진다. 벽시계가 2시를 넘어갔다.

“갑자기 왜요.”

“응? 그야 보고 싶어서지.”

“아~ 거짓말.”

“진짠데.”

니노미야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가 바닥을 보이는 맥주잔에 손을 들어 하이볼을 두잔 시켰다. 꼬치를 그릇에 쿡쿡 찍었다. 끝이 점점 무뎌졌다. 우리 사이도 이랬지. 아주 뾰족했다가 갈수록 무뎌지다가 나중엔 아예 부러졌다고...

“이쪽으로 잠깐 출장 와서.. 혹시 여기 계속 살고 있을까 해서 와봤어. 번호도 그대로더라.”

“그러는 사쿠라이군도 그대로던데.”

“지웠을 줄 알았어.”

“귀찮아서 정리 잘 안 하는 거 알잖아요. 자꾸 바뀌는 사람 번호 갱신도 안 해 놓는데.”

혹시나 해서 건드리지 않은 거지만. 이렇게 언젠가 전화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을 테지만. 그 뒤로는 대화가 끊겼다. 잘 마시지 않는 술이 필요했다. 한잔 두잔 더 시켰다. 사쿠라이는 그 사이에 재떨이를 끌어다 놓고 니노미야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만큼 골초였던가. 기억을 더듬자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떨어져 있었다.

“머리 많이 길었네요.”

뒷머리가 살짝 길었네, 하고 생각했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이발 시기를 미룬 건지 놓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 응. 바빠서.”

들고 있던 꼬치로 니노미야가 길어진 머리칼을 가리키자 사쿠라이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곳을 자기 손으로 쓰다듬었다. 익숙한 듯 어색한 손길이었다. 어쩐지 의식하는 곳이 있는 것만 같은... 니노미야는 손을 내렸다. 

시계가 한바퀴 반 돌고 두바퀴째에 접어들자 사람들이 점점 자리를 파했다. 두 사람의 자리에는 안주보다 술잔이 많아졌다. 사쿠라이는 작게 울고 있었다. 주사가 우는 거였나? 그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만큼 오래 보지 않았군. 니노미야는 작게 웃었다. 잔이 바닥이었다.

이제 슬슬 가죠. 호텔이 어디에요? 사쿠라이는 답이 없었다. 찬바람이라도 맞으면 입이 열릴까 싶어 코트를 입히지 않은 채로 끌고 나왔지만 역시 답이 없었다. 아니면 그냥 우리집에서 하루 자고 가든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게중심을 잠깐 뒤로 젖힌 사쿠라이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억력이 좋단 말이지. 말해주지도 않은 층수를 멋대로 먼저 누른 사쿠라이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잊어버린 게 있을지 궁금했다. 꽤 있겠지만 생각보단 없으리라. 니노미야는 뒷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사쿠라이를 먼저 밀어넣었다.

“씻을 수 있어?”

“말 까네.”

“자기는 그냥 놨으면서. 씻을 수 있냐고.”

“그럼. 씻을 수 있지. 근데 옷이 없는데. 칫솔은 있어, 가방에.”

“꺼내 줄 테니까 씻어. 난 아까 씻어서... 양치질만 할게.”

니노미야는 칫솔을 문 채로 얇은 서류 가방을 열어 여행용 칫솔통을 꺼내고, 사쿠라이의 코트를 받아들어 머플러와 함께 걸고, 입을 헹구고, 사쿠라이가 입을 옷을 꺼내 밖에 두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왜 돌아왔어? 묻고 싶었다.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그때 왜 그렇게 사라졌느냐고부터 물어야 할까? 어디서부터 물어봐야만 할까? 입을 헹구며 궁금증은 뱉어냈다. 물어봐서 좋을 구석이 없을 테다. 물어봤자...

손에 묻은 물을 사쿠라이의 얼굴에 털어 살짝 졸고 있던 걸 깨웠다. 밖에 여기 옷 입어. 잠시 뒤 물소리가 들렸다. 집이 어둡다. 불을 켤지 말지 고민하다가 작은 불만 올린 채로 니노미야는 소파에 앉았다. 

물이 꺼지고 술이 약간 깬 듯한 사쿠라이가 거실로 나왔다. 니노미야는 말없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빛을 등져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눈을 살짝 찌푸리며 소파쪽으로 다가온 사쿠라이가 니노미야가 앉은 곳까지 성큼 들어섰다. 밖에서 누군가의 차가 비상음을 냈다. 새벽 네시에 아주 높은 소리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꺼지지 않고, 어딘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런 곳에서.... 

“너도 머리 많이 길었다.”

사쿠라이가 니노미야의 뺨을 쓰다듬다 이마를 반쯤 가린 머리칼을 뒤로 넘기듯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손바닥이 뜨끈했다. 키스해요. 허리를 숙였다. 누군가가 차 문을 열었다 닫았는지 비상음이 멎었다. 

침대로, 뒷말은 입속에 먹히듯 사라졌다. 길을 아는 니노미야가 미는대로 사쿠라이는 뒷걸음질쳤다. 다리가 걸려 넘어진다고 생각했으나 침대 위였다. 제법 숨이 막히는지 먼저 입을 떼어냈다. 턱에 아직 닦아내지 못한 물이 맺혀 있었다. 바깥이 어둑하게 시퍼랬다. 바지춤에 손을 갖다대자 사쿠라이가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왜 여기로 왔냐고 물어보고 싶지?”

니노미야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보다 단단하게 영근 턱을 살짝 깨물어가며 손을 움직였다. 집 안은 따뜻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사쿠라이가 뱉어내는 숨마다 김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니노미야의 고개가 가슴팍을 거쳐 하반신으로 향하는데도 사쿠라이는 계속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무엇이라도 있는 것처럼. 속옷을 끌러 서로의 열 오른 성기를 맞잡아 흔들었다. 침과 액이 섞여 점점 질척해져갔다. 니노미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더러워지지 않은 손으로 바지를 마저 벗겨내고 허리를 붙잡았다. 손에 땀이라도 나는지 자꾸만 미끄러졌다. 사쿠라이는 그제야 고개를 고치고 니노미야가 있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두웠다. 빛이 들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 없으면 어떡할지 생각도 안 했다. 그냥 있을 것 같았어.”

그 말끝에 니노미야는 침을 삼켰다. 거짓말이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분명 방금 전 자신의 얼굴을 만진 손바닥은 데일 듯이 뜨거웠는데 지금 만지는 몸은 어디든 아주 차가웠다. 열이 오르게 하려고, 차라리 용광로에 들어간 듯 뜨거워서 녹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닿는 곳마다 입을 댔다. 

“그럼 왜, 왜 보고 싶었냐고 하겠지?”

“응.”

“죽으려고 했어.”

한숨처럼 튀어나온 말은 스미듯이 낮았다. 집중하지 않으면 스쳐지나가듯, 기화되어 날아갈 듯 아주 가벼웠다. 니노미야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사쿠라이가 얼굴을 왼쪽으로 돌려 오른쪽 귀 밑쪽을 보여주었다. 둔탁한 흉터가 제법 길게 자리하고 있었다. 모르는 상처였다.

“보여? 그런데 못 죽었어. 그래서 여기 있는 거야.”

아까 니노미야가 들고 있던 것으로 가리킨 위치였다. 머리 많이 길었네요,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짚은 그곳. 그러자 사쿠라이가 가까운 쪽 손으로 머리카락과 함께 쓰다듬은 곳. 그곳은 니노미야가 모르는 사이에 몇 번인지 모르게 벌어져 피를 뱉어냈다 다시 닫힌 증거였다. 그 살짝, 아주 조금, 평소에 자세히 봐두지 않으면 지금 당장은 모를 만큼, 길어 봤자 고작 몇미리쯤 되는.. 뒷목에 딱 맞게 감기는 머리칼....

“머리...”

“응?”

“잡아줘.”

폭탄을 떨어트려 놓고도 사쿠라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속삭였다. 니노미야는 아무것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기요? 응. 어떻게요? 알아서 해. 머리카락 사이로 침범한 손가락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머리칼과 함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마디가 빠듯했다.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다시 침을 삼켰다. 사쿠라이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귀 밑 목 어딘가 아주 무딘 칼로 살이 찢겼다 다시 붙어 영구히 존재하는 그 흉터....... 

그것을 누르고 비비고 만지고 물어뜯고 핥다가 결국엔

가만히 입술을 대 본다.

아주 조용하게 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둔탁한 듯 외롭게..

외로워서 죽으려고 했구나. 그렇지? 죽지 못해서 나를 만나러 왔구나. 나를 만나도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가위질된 흉터에 니노미야가 얼굴을 파묻고 나서야 사쿠라이는 다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가미가 처음 트인 물고기처럼 숨쉬었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소리를 냈다. 눈물로 적셔진 상처는 그것도 물이랍시고 젖어가며 벌어졌다. 니노미야는 마음대로 이를 댔다. 이를 대서 투박하게 붙은 흉터를 긁어내듯 입을 맞추었다. 비린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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