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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에 구멍이 나 버렸어

ns as
2024. 12. 15.





어렸을 적 유치원 하교길 강풍에 날아가는 모자를 주워준 건 동네에서 한 번도 본 기억 없는 모르는 아저씨.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걸 한 번 참고, 모자를 받아들고, 인사하려고 위를 올려다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봐도 고요했다. 그땐 그냥 어른은 다 그렇게 걸음이 빠른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 축구 하다 다른 팀도 아니고 같은 팀이랑 대차게 싸우고 주먹 두 방씩 갈겼을 때 모르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그네에 앉아 이쪽을 짠하게 바라보던 건 역시 모르는 고등학생. 분을 삭이지 못해서 구경 났냐고 소리지르려고 그네 쪽으로 달려갔더니 바람도 불지 않는데 그네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네만 흔들리고 있었다.

신발장을 열었더니 살포시 떨어져내린 러브레터. 수줍은 마음으로 봉투를 열려고 했는데 누군가 이미 연 흔적이 있다. 갑자기 불쾌해져 급하게 열어젖히면, 꽉꽉 눌러 쓴 귀엽지만 좀 서투른 글씨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접착력이 다 떨어진 포스트잇 하나가 끼어 들어가 있다. ‘고백 받아주지 마’

러브레터에 초콜릿으로 응대했다. 양갈래 머리를 얌전하게 땋은 동급생은 얼굴을 발갛게 하고 ‘그럼 우리 사귀는 거다...’ 라고. 그래도 난... 그 순간까지도. 왜 그 포스트잇은 고백을 받아주지 말라고 했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두달쯤? 여름방학이 막 되자마자 사귀던 여자애는 환승을 선언했다. 미안... 난 처음부터 그 쪽지에 대한 오기로 사귀자고 했던 거였기 때문에 별로 슬프진 않았다. 그것보다 방학에 접어들어서 쪽지를 쓴 범인을 찾을 수 없는 게 더 분했다. 씩씩대며 집에 돌아오자 골목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내가 오는 걸 기다린 것처럼. 남자는 씩 웃으며 “받아주지 말라고 했잖아” 했다. 쪽지 쓴 사람! 나는 가방을 내던졌다. 근데 가방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가방 버클이 아스팔트에 긁혔는데.

어라 그런데 그 사람. 그 남자들. 얼굴이 다 똑같았던 것 같은데... 무척 닮았는데.

그렇게 한참을 잊고 잊고 실은 기억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왜냐하면 애초부터 나의 삶에 없던 존재였으니까...

그럼 그때 내 모자를 주워준 건 누구였을까. 내가 달려가 주워놓고 착각하는 걸까?

그때 그네에서 나를 가엾게 쳐다보던 건 누구였을까. 내가 다른 시선을 엇갈려 생각한 걸까?

그때 러브레터에 쪽지를 끼워넣어놓고, 두달을 기다려서, 내 집 앞에 서서, 그 말을 하고 사라진 건 누구였을까.

내가 착각하는 걸까? 아니면... 실은 현실과 아주 닮은 꿈이었을까?





남고에서 처음 만난 아이바. 자꾸 눈이 가고 손이 가고 마음이 갔다. 집 가는 방향이 같아서 등교도 같이 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동아리도 같이 들고 하교도 같이 했다. 숙제도 같이 하고 영화도 같이 보러 갔다. 그걸 보는 다른 친구들은 그냥 심드렁하게, 그럴 거면 그냥 아예 사귀어버리고 영화관에서 커플 할인이라도 받아라, 고 했다. 난 괜히 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괜시리 버럭했는데 아이바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그럴까, 했다. 그럼 그럴까. 그건, 왠지 중학생 때 러브레터를 받아 줬던 내 마음 같기도 해서...

그래도 사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남들이 놀릴 때 그냥 미친 척하고 팔짱 한 번 더 껴 주는 패턴이 추가된 것밖에 없었다. 첫키스는 청순한 대학생 누나가 아니고 입술이 거칠었던 아이바. 한여름 밤에 공원 놀이터에서, 얼굴이 벌개져서 어땠냐고 물었더니 입술이 말랑말랑하다, 랜다. 웃기지 마. 너 수염 간지러워. 그래? 면도했는데. 면도기 바꿔라. 영 별로다. 쇼쨩은? 어땠는데? 시끄러워. 

첫키스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아이바한테는 아니었으니까. 알고 있긴 했지만 막상 확인해보면 회피하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졸업을 반년 앞두고의 첫키스라니 볼품없어. 아이바가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겨우겨우 말리고 나는 혼자서 일부러 멀리 돌아서 집에 왔다.

근데 집앞에 누군가... 

고등학생인가? 교복 차림은 아니다. 이 골목에 저정도 되는 애가 기다릴 만한 사람은 없는데. 나는 무서워서 가방을 추켜올리고 괜히 인터폰을 누를까 했다. 데려다준다는 거 거절하지 말걸 그랬나. 가로등 불빛을 등져서 얼굴이 잘 안 보였다. 좀 가까이 오니까 확실히 교복은 아니어서, 그럼 대학생인가, 아님, 뭘까, 속으로 막 애를 태웠다.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가방에서 열쇠가 도무지 손에 잡혀 나오지 않았다. 가방을 바닥에 던져서 뒤집어 엎으려던 찰나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좋아하게 됐어?”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안 돼.”

뭐를?

“좋아하게 되면, 너, 슬플 거야.”

왜?

“이번에도 내 말, 안 들을 거지?”

너 누구야?

난...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내 말, 전부 입 밖으로 나오고 있는 거야?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래, 똑같다. 모자를 주워 준 아저씨. 나를 쳐다보던 고등학생. 나에게 고백 받지 말라 하지 않았냐던 남자. 나도 모르게 그 애의 팔을 덥썩 잡았다. 이번엔 확실히 물질이 느껴진다. 신체가. 육체가. 

“너 누구야...?”

“나, 니노.”

“그런 사람 난 몰라.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화내지 마. 난 너 알아.”

“스토커야? 어디 학교 다니는데? 너 뭐야?”

“스토커인가. 말해줄 수 없어. 내가 뭔지는 너도 알아. 나도 너 알고... 너도, 나 알아...”

내가 감싸쥔 그 애의 팔이 살짝 떨렸다. 그걸 느끼기도 전에 그 애는 내 손을 떼어냈다. 가버리려는 거지? 나는 떨어진 손으로 그 애의 어깨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 애는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이바, 좋아하게 되면 안 돼. 그럼 너 슬플 거야. 난 말했어. 나는 분명히.”

“그니까 무슨 소리,”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사라졌다. 또. 나는 분명 나를 뿌리치고 도망친 거라고 생각해서 골목 끝에서 끝까지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뛰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었다. 조용한 골목에 발소리는 내 것밖에 없었다. 엄마가 2층 창문을 열고 얼른 들어오라고 하는 탓에 그 애를 또 잊어버렸다.





대학교도 같이 가냐. 징그럽다 너네.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렇게 말했다. 아이바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동무하면서 점심 메뉴나 고르고 있는데, 나는, 그 애는 잊어버리고, 좋아하지 말라는 말만 기억하고 있었다. 첫키스 이후로는 그게 전부였다. 손잡거나 입맞추거나. 다음 단계가 있다면 갈 수 있겠지. 가고 싶은데. 나, 좋아하는데, 아이바를. 우리 분명히 사귀고 있는데. 저 애들이 아무리 놀려도...

파스타 두 개를 시켜서 나눠 먹다가 드링크바에 세 번쯤 다녀왔을 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 성인 되려면 내가 거의 일 년이나 기다려야 돼. 아이바는 먹다 말고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날 쳐다봤다. 나 안 기다릴래 그냥. 

장남 졸업식날 하와이로 여행 가는 부모님도 참 어지간하지. 졸업식에 참가해서 금일봉을 건네주고는, 너 잘 키운 우리들에게도 포상을 줘야 한다면서, 떠났다. 집에 아무도 없어... 아이바는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갑자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올 거야? 말 거야? 

첫키스도 아이바. 첫경험도 아이바. 나, 너한테 너무 많은 걸 준 거 아니야? 아파서 눈을 찡그리다가 그렇게 털어놓아버렸다. 아이바는 하하하 웃으며 내 눈가에 키스했다. 왜, 아까워? 아니, 그냥. 너, 너는 처음 아닌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렸다. 아픈 걸 핑계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무슨 표정이었을까...

난방도 안 틀었는데 땀이 질질 흘렀다. 아이바한테서 흐른 땀이 나한테 뚝뚝 떨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악 아니면 억 하는 신음 소리만 냈다. 여자애 같은 소리를 내 줄 수가 없어서 미안했다. 아이바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그게 미안했다. 왜였을까...

다음날 거의 비몽사몽인 아이바를 데리고 하염없이 번화가를 돌아다니다가 자꾸 아는 얼굴들을 마주쳤다. 다들 졸업에 신나서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도 몰랐다. 나는 내가 상처를 줘 놓고 상처받은 것처럼 굴었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 사람을 쳐다봤다. 한참을 잊고 지냈던 그 얼굴이다. 또 그 자식. 저 자식이야. 저 녀석 때문에...

나는 왕복 6차선을 무단횡단해서 뛰어가려다가 아이바에게 잡혔다. 왜 그래? 죽으면 안 돼! 아이바가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아서, 그자식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근데 고개를 드니까 그자식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시 뛰쳐나가려니까, 그자식이 손을 뻗어서 나를 말렸다. 난 멍청하게 그 손짓에 가만히 있게 됐다. 전화기를 가리켰다. 폴더를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히자 메일이 와 있었다.

[내 말, 안 들을 거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다 어길 거라는 거, 전부 알면서 괜히 물어보는 말투. 화면을 때리듯이 닫고 길 반대편을 쏘아봤는데 없었다. 또, 없다.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 나를 더 이상하게 쳐다보던 아이바가, 왜 그러냐고 했다. 나는 어렸을 때 돈 뜯긴 양아치를 본 것 같다고 했는데, 그럼 그냥 지나가면 되지 왜 덤비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러게. 난 그러게, 라고 했는데, 아이바는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잊어버려, 그냥. 잊는 게 좋아. 그러는 게 편해.

[그래도 좋아하게 되면 안 돼.]

[그럼 너 슬픈데]

[너 슬프면]

[나도 슬프지]

[너도 알면서...]

집에 돌아가니 이런 문자들뿐. 내가 뭘 안다는 거야. 나는 너 이름도 몰라. 나는 너 몇 살인지도 어디 사는지도 몰라. 니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 꿈에 나온 건지 내가 헛것을 보는 건지 뭔지도 몰라. 근데 내가 뭘 안다는 거야. 너는 뭘 아는 거야!

실은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에 알았던 사이라든가. 기억에 남기 전 친했던 사이라든가. 내가 발견 못한 것뿐, 실은 계속 같이 있었다든가. 여러가지 경우를 다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 유치원 원모를 주워 준 사람은 분명히 아저씨였고. 내가 초등학생 때, 날 보고 있던 건 고등학생이었고. 

근데 저번에 이름, 알려줬던 것 같은데.




‘너 슬플 거야’

그 말. 

그러니까 나 슬픈 걸 왜 니가 알고 있는지. 알아도 왜 굳이 말해 주는지. 마치 내가 슬퍼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슬프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내가 슬픈 거랑, 이름도 모르는 너랑 무슨 상관인지를...

대학 첫 여름방학. 대체로 내 여름방학엔 자꾸 비극이 찾아온다. 

나더러 방학이니 바다에 놀러 가자고 하면서 차를 빌려 오던 아이바가 빌린 차에 탄 채로 트럭에 치였다. 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구급대원에게 차차순위 연락을 받는 것뿐. 보험 다 들었는데 보험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죽은 사람 살려주는 건 어떤 보험사도 못 해 준다. 바다에 가자며? 너 어디 갔어? 넌 정말 사람 애태우는 데에 천재야. 진짜 신경 쓰여 죽겠어. 그러니까 돌아와. 운전 교대해 줄게. 조수석에 설탕 흘려도 잔소리 않을게. 뜨거운 거 사 오라고 했더니 차가운 거 사 와도 봐줄게. 아이바. 너 어디 있어...

여름을 다 날렸다. 나와 아이바를 아는 친구들은 우리 집에 들러서 한번씩 나에게 한 번 더 조의를 표했다. 너무 죄책감 갖지는 말라고. 아이바도 그렇게 말했을 거야. 니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나도 알아. 친구들이 돌아가면 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숨이 막히도록 소리를 질렀다. 아이바... 나 심장이 없어진 것 같아. 아이바. 

마사키. 너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 첫키스도 첫경험도 사랑도 다 가져갔잖아. 너,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가져갔잖아. 가져간 만큼 줬잖아. 그럼 내가 받은 것들, 다 어떡해. 누구한테도 줄 수가 없잖아. 받은 만큼 너한테 줘야 하는데. 우리, 서로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줘야 하는데...




일주일을 방에 처박혀 있으니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나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들어오라고.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은 채 습해서 숨도 안 쉬어지는 여름밤 또 골목으로 내쫓겼다. 난 담배에 불만 붙이고 엉엉 울었다. 연기만 날리고 내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타들어가기만 하고 내 안에는 아무것도... 나 텅 빈 것 같아...

“좋아하게 됐지?”

눈이 번쩍 뜨였다. 다 탄 담뱃재가 내 손에 떨어졌다. 앗뜨거. 펄쩍 뛰어 일어났는데 내 눈앞엔.. 금발의 그자식. 머리가 막 길어서 여름밤 습한 바람에 척척 감겨 날렸다.

“좋아하게 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는 건데?”

“너 지금 슬프지? 나 모르는 거 없어, 너에 대해서라면.”

“아니, 지금은 짜증 났어. 너 때문에. 니가 나타나서 그런 말이나 지껄이니까! 뭘 자꾸 안다는 거야. 뭘 모르는 게 없다는 거야. 니가 뭔지도 모르는데 나는.”

“알게 되어 있어. 성급해하지 않아도 돼.”

내 손에서 담뱃갑을 뺏어서 멋대로 한대 물더니 멋대로 불까지 붙인다. 연기를 아주 아주 깊게 들이마셔서 폐 맨 밑바닥까지 닿게 할 정도로 숨을 들이쉰다. 스으으... 하고 내뱉는다. 나는 그자식이 담배 한까치를 다 피우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자식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금 그냥 골목 끝에서, 차라리 아이바가 뛰쳐나와서 나를 막 닦달했음 좋겠다, 막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막 바람을 피우는 거냐고 의처증 걸린 신혼의 남편처럼 화를 냈음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냥 잊어버려. 미안해.”

그러더니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뒷꿈치로 비벼 껐다. 담뱃불이 꺼지자 그자식도 사라졌다. 





그래, 시킨 대로 하지. 저번에 니 말 안 들었다가 아주 고됐으니까 니 말대로 한번 해 본다. 실은 아이바도 그랬으니까. 잊는 게 좋다고 했으니까. 그치만, 그렇게 말해 준 너는 잊을 수가 없는데, 그치.

학교, 알바, 학교, 알바, 학교, 알바, 다시 학교, 그러니 졸업. 

수석으로 졸업해도 감흥이 없었다. 나한테 뭔가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만으로는 계속 넋나간 사람처럼 살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나를 닦달했고 엄마도 날 걱정했다. 난 그런 게 가장 부담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걱정시키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감당이 안 됐다.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그럴 일을 없앴다. 취활하느라 넣은 이력서가 몇 통이 될까. 이 스펙에도 취업이 이렇게 어렵단 말이냐. 계속계속 돌아오는 낙방의 알림에 혼자서 미친 듯이 퍼붓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전봇대에 기대 잠들 무렵.

“너무 걱정 마” 라고 했다.

크로스백을 뒤로 메고 접이식 우산을 한 손에 쥔 고등학생이 나에게. 새벽 세시에 우리 집 앞 골목을 지나면서 나에게. 뭘 걱정 말라는 거야... 머리가 빙빙 돌아서 눈에 초점이 안 맞는다. 저리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구역질이 올라와 입을 다물었다.

정신을 차리니까 집.

핸드폰을 여니까 메일.

[축하해 합격]

발신자 표시제한.

뭐야 누구 놀리는 거야. 합격은 무슨 합격이야. 

방에 굴러다니는 페트병을 쥐어짜서 물을 일리터는 마시고 있는데 엄마가 방문을 걷어차듯이 열면서 들어왔다. 아들! 이거 열어 봐라. 

어 진짜 합격이다. 제일 가고 싶었던 곳. 엄마랑 얼싸안고 소리를 질렀다. 와! 이 똘아이 같은 취활도 끝이다! 퇴근한 아버지한테도 보여드리고 술을 얻어 마셨다. 아버지가 한참을 열지 않은 술을. 하하하. 합격했으니까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메일 생각에 한군데가 너무 찜찜하다. 어떻게 알았냐. 우리 집 우체통 뒤졌어? 점유이탈물횡령죄 같은 걸로 막 신고할라니까. 그건 아닐 거다. 우리 엄마는 우체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우체통을 여니까... 근데 그럼 진짜로 어떻게 알았어. 메일 온 시간이 새벽 4시다. 어떻게 알았어...

[나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

[너에 대해서는...]


스팸메일함에서 썩어갔다. 30일이 지나서 삭제됐다. 




어영부영 신입 타이틀을 뗄 정도가 되니까 서른이 목전. 이직을 준비할까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3차까지 가서도 제정신 붙들고 택시 잡아다 다 집에 보내드리고 신호등이 점멸등으로 변한 보도 연석에 털썩 주저앉는다. 남들 다 집에 보내줘도 나 하나 집에 못 가면 꼴이 너무 웃기잖아. 하하하하... 그런데 집에 갈 기운이 너무 없다. 어깨가 단단히 굳었다. 

“넌 너무 걱정이 많아.”

고개를 들자 낯익은 듯 낯선 얼굴. 눈을 찌푸리자 그자식인 걸 알았다. 벌떡 일어나려다가 그럴 힘이 없어서 그냥 말았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웃기냐? 시비를 걸 힘도 없었다.

차도 쪽에서 그자식은 쪼그려 앉았다. 나와 시선이 맞는다. 본 것 중에 가장 단정한 모습이었다. 마치 직장인처럼. 쥐색 정장이 어울리는 듯 안 어울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반질반질해보이는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너 내가 우습냐.”

“넌 너무 조급해해.”

“그래서.”

“이거 봐. 어깨가 다 굳었어.”

“그래서어.”

“너무 힘 주고 살지 마.”

“매번 이럴 때에만 나타나서 뭐라도 된 듯이 한마디씩 나불나불. 너 뭐냐고.”

“나, 니노라니까.”

“이름이야, 그게?”

“응. 알면서. 아니야, 몰라도 돼. 기억 안 해도 돼.”

너 내가 우습냐니까.

내가 눈을 또 가느스름하게 뜨자 내 앞에 쪼그려 앉은 그자식은 아까 전의 내가 했던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쓱 넘겨주면서. 근데 그렇게 앉아있으려니까...

왠지 내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던 아이바가 생각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자식이 만져준 건 앞머리였는데.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저쪽에서 미친듯이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그자식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자식의 팔을 확 잡아당겼는데 딸려오는 게 없었다. 그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힘을 뒤로 준 나만 나동그라졌을 뿐. 턱을 덜덜 떨면서 차의 끝을 바라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차는 유유히 큰길로 향했다. 점멸등만 깜빡깜빡. 또 없다.




길가다 니노가 보이면 막 뛰쳐나갔다. 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악악악. 니노가 손에 잡히면 잡힐 때마다 일단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소리를 지르고 사과하고 소리를 지르고 사과했다. 니노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너 진짜 내가 우습냐. 나 왜 미친 사람 만들어. 나 정상이야. 

그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미쳐 있는 거라면 덜 미쳤고 더 미쳤고를 어떻게 판단할 거야.

한참 그렇게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하는 동안 오히려 일은 잘 풀렸다. 연봉이 오르고 직급이 바뀌고 원하는 프로젝트를 하게 되고. 문득 그 사실을 깨달으니 또 니노는 내 눈 앞에 있었는데

이번엔 “앞으로도 그렇게 힘 풀고. 너무 걱정하지 말구. 마음 편하게 먹고 말이야.. 후회도 하지 말고. 응? 미친 사람이면 뭐 어때. 살아 있기만 하면 되지.” 라고. 나쁜 말은 하나도 안 하고. 근데 난 또 그 말을 들으니까 한참을 생각 안 하고 있었던 아이바가 생각나서... 두루마리휴지를 확 집어던졌다. 휴지가 끝을 모르고 풀려갔다.


내 앞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 녀석.

나타날 때마다 얼굴에 쌓인 연륜이 매번 달라지는 그 녀석.

만나서 물을 때마다 나이가 달라지는 그 녀석.

빡빡이일 때도 있었고 머리가 너무 길어서 제발 좀 자르라고 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딱 좋을 때도 있었고 만지고 싶을 정도로 파마가 됐을 때도 있었고. 고등학생 같을 때도 나보다 두배는 나이가 많아 보일 때도 대학생 같을 때도 동년배 같을 때도... 어쩔 땐 중학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너 정말 뭐야.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그런데 참, 오래 같이 있어 주지를 않잖아.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한참 쌓여 있는데...

그녀석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기까지 삼십 년도 더 걸렸다. 난 삼십 년치 질문이 한가득인데. 마주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던 그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참 곤란하다. 신칸센에서 타고 내릴 때 핸드폰이 바뀌어서 어떻게든 연락을 해 만났는데... 니노랑 똑같이 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니노미야 카즈나리입니다.”

“네?”

“진짜 오래 걸렸네요.”

“뭐가요?”

“이렇게 만나기까지요.”

“저를 아세요?”

“네. 사쿠라이. 사쿠라이 쇼. 맞죠? 명함 건네받았거든요. 다 확인했어요. 있잖아요, 전, 엄청 만나고 싶었어요. 실은 꿈에만 나오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근데 이렇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거든요. 내가 힘들 때에만 나타나서요. 어쩔 땐 엄청 밉구요. 어쩔 땐 엄청 보고 싶었구요. 난, 이름 한 번 잊어버린 적 없는데, 매번 내 이름을 물어보는 거 있죠. 나는 다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니노.”

“네.”

“있잖아. 얼마 전에. 유치원생 모자 주워준 적 있어?”

“네 아마도. 아, 있어요, 있어요. 주워 줬어요.”

“그애한테 고맙다는 말, 들었어?”

“에. 잘 모르겠는데. 들었나? 왜요?”

고마워. 주워 줘서. 그때 내 모자를. 그때 내 분노를. 그때 내 서글픔을. 그때 내 우울을. 그때 내 방황을. 그때 내 막막함을. 그때 내 답답함을. 그때 내 길잃음을. 그때 내 모든 걸...

“우리 되게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아.”

“저도 그런 기분이 들어요. 익숙해요.”


그러니까 정말 걱정할 게 아니었나 봐. 모든 게 의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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