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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18.
막 받은 소프트콘을 한 입 먹자마자 넘어져서 다 버렸을 때. 날 일으켜 주고 손을 닦아 주고 새 걸로 하나 더 사서 손에 쥐여준 누나. 누나 고맙습니다 하자 그 사람은 당혹스럽게 웃으며 누나 아닌데, 했다. 난 예쁘면 다 누나라고 했다. 그 누나에게도 한 입 나눠주려고 했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에. 내가 누나라고 해서 화났다.
이유 없이 여자애한테 정강이를 엄청 세게 얻어맞아서 유치원 밖으로 뛰쳐나와 대문 옆에서 청승맞게 훌쩍일 때. 지나가던 고등학생이 다가와서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왜 울어~ 울지 마. 남자가 그런 걸로 울면 아깝다. 난 그 말에 더 울었다. 엉엉엉엉. 야 미안해...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 발라 주고 밴드를 붙여 줬다.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그런 것들 다 필요 없었는데도. 누가 나를 때린 거라니까, 하려는데 눈앞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밴드는 붙어 있었다. 연고가 너무 많이 발려서 막 떨어지려고 했지만.
엄마가 크게 다쳐서 가방도 내버려두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왜인지 학교에 두고 온 내 가방을 들고 나에게 온 남자. 가방 지퍼를 다시 한 번 잠가주면서 나에게 ‘금방 괜찮아지실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잘 챙겨드려’ 했다. 의사 선생님인가? 닫힌 문을 쳐다보던 고개를 돌렸는데 내 옆 의자엔 가방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 선생님들한테서 나는 이상한 소독약 같은 냄새도 없고.
나 독감 걸렸을 때. 누나는 수학여행. 엄마는 계모임. 아빠는 출장. 병원도 못 가고 끙끙 앓는데 이마에 철퍽. 목 뒤로 차갑게 식은 물이 질질 흘렀다. 눈을 반쯤 떠 보니 뭔가 양아치처럼 생긴 게 내 앞에 서 있다. ‘좀 나으면 병원 가고. 뭘 또 아프고 그래.’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프냐? 그렇게 말하려다가 잠들었다.
부모님 장례식에도 남자는 나타났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같이 울어 줄까?”
또 사라질까 봐 난 그 사람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또 없어질까 봐 볼을 붙잡고 키스했다. 그 순간에는 더 이상 나에게서 무언가가 떠나가는 게 지겹도록 싫었다.
“발랑 까졌어! 고딩 주제에!”
“뭐가요?”
“모르는 사람을 막 붙잡고 초면에 키스부터! 너 처음 아니지! 그리고,”
“모르는 사람 아닌데. 나 알잖아요. 우리 집에도 왔었죠?”
“어. 기억해?”
“네. 저 기억력 좋아요.”
“아.”
남자는 내가 자기를 기억할 줄 몰랐다는 듯 그대로 살짝 굳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내가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크게 숨을 들이쉬자, 그 호흡에 맞춰 남자는 사라졌다. 손에 감기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허전했다.
대학을 갈까 말까 하다가 덜컥 붙어서 사귀던 후배한테 이제 그만하자고 하고 뺨 얻어맞은 날. 어디서 담배 연기가 날아오길래 그쪽을 바라보니 연기처럼 서 있던 사람이 없어졌다. 대학에 가서 어쩌다 사귄 연하에 좀 귀엽게 생긴 여자애는 엉엉 울면서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까 내가 자기를 안 좋아하는 것 같다는데. 이해가 안 돼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또 뺨을 얻어맞았다. 넌 사랑했던 사람을 이렇게 막 패고 그러냐?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보내줬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까 좀 한참 차분해진 스타일의 그때 그 사람. 나한테 먼저 한발짝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연하가 그렇게 좋냐?’ 그러고는 나를 지나쳐 사라졌다. 난 억울했다. 얼마나 사귀었다고?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자꾸 불쑥불쑥.
왠지 날 다 아는 것처럼.
기분이 너무 나빠서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해져서.
처음엔 연상을 한번 만나 봤다. 근데 사귈 때도 헤어지게 됐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동갑도 만나 봤는데 너무 어영부영 끝나서 나조차도 그 사람이 나타날 타이밍을 몰랐다. 그럼 나한테 큰일이 나면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팔을 부러트린 적 있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쯤 되자 내가 그냥 꿈이라도 꾼 것 같아서, 모른 척하기로 했는데.
누나 결혼식날 남자는 하객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나만이 그 사람을 알았다. 남들은 그 사람을 신경도 안 썼으니까. 와 되게 뻔뻔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난 나도 모르게 그 사람한테 가까이 가서 식장 밖으로 끌어냈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따라오다가, 이내 한번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누나 있는 곳으로 가야지, 하면서. 마치 보호자라도 된 것처럼. 뭐라고 말을 걸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을 떠밀려서 뒤를 돌아봤더니 날 밀어주던 힘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가족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는데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누나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건 축하해야 할 일인데.
잊을 만하면 나타나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고. 신경을 안 쓰고 싶은데도 자꾸만 나타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나쁘다. 다음엔 이름을 물어봐야지. 대학 졸업식날 학사모를 한손에 구겨쥐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난 건 가쿠란 차림의 그 남자... 애.
“이름 뭐야?”
“이름은 왜?”
“누군지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럴 필요 없는데.”
“나도 알려 줄게. 나 니노미야 카즈나리. 이제 니 차례야.”
“나 사쿠라이 쇼...”
“오늘은 왜 왔어?”
“졸업 축하한다고 하려구요. 말해 준 적 없었던 것 같아서.”
“왜 존댓말? 너 누구야?”
“그거는요. 말해 줄 수 없어요. 어쨌든 다 알게 될 거니까.”
가쿠란의 남자애는 곤란한 듯 웃다가 자기 두 번째 단추를 확 뜯어서 내 손에 쥐여 주고 뒤돌아 달려나갔다. 난 남자애를 따라가려다가... 문득 주먹을 폈다. 웃음이 났다. 야. 졸업은 내가 하는데 왜 니 단추를 나 주는 거야.
그 뒤로는 생각보다 시덥잖은 일에도 한번씩 얼굴을 보이러 왔다. 나 오디션에서 열 번 연속으로 떨어졌을 때, 좀 직장인처럼 보이는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이름 뭐더라? 니노요. 아 그래 니노. 괜찮아. 그 사람들이 너 못 알아본 것뿐이야. 니 재능 알아줄 사람 분명히 나타나. 어떻게 알아요? 난 너 아니까. 내가 알면, 다른 사람들도 곧 알 거야.
남자가 했던 말대로 곧 다른 오디션을 덜컥 붙었다. 그 공연이 좀 잘돼서 작품 제안이 제법 들어왔다. 쉴 틈 없이 무대에 서고 내리고를 반복하자 이젠 반대로 진짜 내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할까. 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다. 근데 그게 어떤 나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대 앞의 나인지 뒤의 나인지. 보여준 적 없는 뒤의 나를 좋아한다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내가 무대에 서는 배우의 하나로서. 내 모든 걸 보여 줘도 될지. 그래도 배우로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지. 이젠, 무대에 설 때마다 답지 않게 너무나도 긴장해서, 매일매일 모든 공연을 다 망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다 그만둬 버렸다. 한 달 넘게 집에 처박혀 있었다. 방바닥에 누워서 가만히 있다 보면 눈물이 막 흘렀는데 그걸 닦을 기운조차 없어서 바닥에까지 눈물이 줄줄 떨어졌다. 그러자 남자가 내 집에 오는 빈도가 늘었다. 난 실실 웃으면서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자꾸 와?”
라고 했다.
“너 슬퍼 보여서.”
난 울고는 있었지만 절대 슬프지는 않았다.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너 슬플 땐 혼자가 아니라고. 나 생각하라구. 그러라고 오는 거야.”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바라보자 남자는 빙긋 웃어 주었다. 날 여기 두고 마음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라면서 빈정대려다가, 나도 그냥 한번 웃었다.
어느날. 나에겐 아무 일도 없던 날. 야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집에 돌아왔는데 문앞에 사쿠라이 쇼가 앉아 있다. 난 마른 세수 한 번으로 꿈에서 깨려고 했는데 얼굴에서 손을 뗐는데도 쇼는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왜 왔는지 물어보려다가 한 번쯤은 무시해 보고 싶어서 괜히 모른 척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내가 문을 닫기도 전에 냉큼 들어왔다.
“너 여자친구가 너무 좋아서 막 무서웠던 적 있어?”
“갑자기 왜요?”
“그냥 궁금해서.”
“아니 뭐 별로.”
“아니야. 뭐어... 그게.”
좀 머뭇대다가 시키지도 않은 얘기를 막 쏟아붓는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지금 아직 대학생인데. 난 존댓말과 반말 사이 어중간한 곳에 뭐라고 태클을 걸까 하다가 한 번 참았다. 내용은 별거 없고. 지금 사귀는 녀석과의 얘기가 전부.
“제가 달려가서 아이바 같은 거 좋아하지 말라고 할까요?”
“하하하. 어떻게 하게.”
내가 갑자기 터무니없는 소리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난 진심이었는데. 나 슬플 때마다 와 주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거 보고 싶지 않은데. 나, 시간을 뒤돌아 달려가서라도 그렇게 말해 줄 자신, 있는데.
나한테 오는 시간보다 오지 않은 때가 많은 그 사람을 생각하느라 시간을 다 써 버린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서 신경을 돌리면 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정말 말 그대로 아무나 만나기도 했는데 오히려 너무 아무나 만나서 마음이 내내 딴곳에 있었다.
나 슬플 때마다 오는 거면 난 평생 슬퍼야 해?
조금만 더 같이 있어. 나 힘들 때만 오면서. 너 힘들 때만 나 찾으면서. 나 힘들 땐 내가 안 힘들 때까지 같이 있어 주지 않잖아. 너 진짜 이기적이야.
넌 그곳에서 아이바를 좋아하고 난 여기서 널 좋아하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차라리 2차원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찾아갈 거야.
아직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던 극단 선배에게 급하게 연락이 와서 대타 서러 나갔을 때. 무서워서 도망쳤던 연기라는 거에 다시 나도 모르게 발을 내딛게 됐을 때... 갑작스레 쏟아지는 조명. 익숙치 않은 의상. 귀를 때리는 음향. 그런데도 나를 바라보는 관객들. 서로 나누는 대화들. 퍼붓는 대사. 나도 모르게 흐르는 땀. 차분해지는 심박수. 열이 도는 피부.
고맙다며 선배와 극단 사람들이 밥을 샀다. 나는 그 고양감에 도취돼서 주는 대로 들이켰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연기에서는 도망쳐 있고 하는 일은 편의점 야간뿐으로 단단히 굳은 삶에 뜨거운 물이 너무도 세게...
자리를 파하고 집에 가려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휘청휘청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피해주려고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나 안아 줘..............”
“응?”
“지금. 엄청 세게. 막 터질 것처럼...”
“왜요?”
“나 지금 너무너무 슬퍼서... 심장 뛰는 소리라도 겹치고 싶어서. 그러니까 안아 줘...”
일부러 나를 찾아온 것 같다. 울먹이는 것 같다. 나에게 부딪힐 정도로 그렇게 급하게 달려온 것 같다.
내 손을 감싸쥐고 자기 가슴에 올렸다. 힘 줘봐. 난 시키는 대로 힘을 줬다. 야이씨. 아귀힘이 아니고. 만지지 마. 에? 자기가 올려 놓고. 그니까 그렇게 만지라는 게 아니고. 손바닥 펴고, 여기를 막, 엄청 세게 밀어 봐. 응. 마, 만지지는 말라니깐. 응... 나 여기 텅 비었어? 아님 뭐라도 있어? 심장,
느껴져?
네. 있는데요? 잘 뛰어요.
나 심장이 없어진 것만 같아서......
네?
확인하고 싶었어...
힘을 주던 오른손에 걸리는 게 없어져 팔꿈치가 펴졌다.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쇼의 가슴이 이 앞에 있었는데. 심장이 없어진 것 같다길래 심장까지도 만져 주고 싶었는데. 그거 잘 펄떡이는 것만 확인하고 막 사라졌다. 너무 이기적이야. 그렇게 없어져버리면, 심장도 없어진 것 같잖아.
난 사는 게 다 쉬운 줄 알았다. 근데 당장 쇼가 그렇게 나에게 찾아온 이유 하나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할 순 없는 거였다. 혹시 계속 살던 곳을 벗어나면 찾아오지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멋대로 지방에 가는 신칸센에 탔다. 그 동네를 막 하염없이 돌아다니다가 어떤 유치원생에게 모자도 주워 주고. 아 뭔가 누군가를 무척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했는데.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내리다가 핸드폰이 뒤섞였다. 시간이 촉박해 확인을 못 했는데 남의 핸드폰이었다. 어떻게 비상 연락처를 찾아 연락했는데 이름이 똑같다.
생긴 것도.
“니노미야 카즈나리입니다.”
“네?”
“진짜 오래 걸렸네요.”
“뭐가요?”
“이렇게 만나기까지요.”
난 알 수 있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거.
내가 너한테 의존했던 것보다는 아니겠지만 너도 나, 이렇게 한번에 알아보고 놀랄 정도라는 거.
그러니까 지금은 미로를 마구 헤매다가 결국은 이 미로에 출구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만 같아. 막상 이렇게 만나게 되니까, 나, 다시 돌아가서, 그냥 너 슬플 때마다 내가 뭐라도 말해 주고 싶어. 언제의 나라도 괜찮으니까 언제의 너에게 가서 말이야. 슬프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별거 아니라고, 다. 나 말야. 실은 지금까지 제대로 해낸 게 하나도 없는데, 너한테 그렇게 말해 줄 수 있다면 되게 성공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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