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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12.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지 않는다는 나와. 지구를 켄다마 구슬처럼 요리조리 멋대로 굴리는 그녀석. 나에겐 한 달이나 물을 주지 않아도 되는 다육이를 준대도 그것을 죽여버리고 말 테지만. 그녀석에겐 난초를 갖다준대도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고 말 것이다. 그것이 나와 그녀석의 차이.
친구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라고 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그녀석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사쿠라이. 너 걔랑 친하지. 걔랑 아는 사이지. 걔가. 니노미야가. 니노가. 니노...
나와는 자주 볼 일도 없었지만.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단언하건대 니노미야와는 친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와 내가 친하다는 전제 하에 이것저것 내뱉는 사람들의 면전에 대고, 전혀 친하지 않아, 라거나, 알지 못해, 라고는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웃으면서 얘기를 듣기만 했다. 한 번도 대꾸한 적은 없었다. 하물며 그렇지, 라는 흔한 맞장구조차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착각했다. 말하지 않는 건 진짜라는 뜻이 아닌데. 나, 니노라는 녀석, 알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 세상엔 언령이라는 게 있다고. 말을 계속 하다 보면, 결국엔 말처럼 된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한 적도 없었다. 난 그랬다. 어느 하나 확고하게 말할 수 없는 마음. 그땐 그랬다고.
완전히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건 사실. 그래봤자 얼굴이랑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인데. 저번에 한번 담뱃불을 빌려 줬을 뿐인데. 그걸 누군가 보고 소문이라도 퍼트린 걸까. 의심의 갈래가 수만가지로 뻗었다. 그런데 그 끝이 닿는 곳이 수도 없이 많아서 함부로 누구를 들쑤실 수도 없었다.
니노미야와는 자주 볼 일도 없었지만...
그때 나는 삶이 나를 찔러대는 것을 겨우 견디고 있었어서, 반대로 나 자신이 그만큼 뾰족해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지만, 나는 그 삶의 꼬챙이를 견디기가 힘들어서, 간만에 얼굴을 보게 됐던 어느 목적 모를 술자리에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니노미야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만 목덜미를 넘길락말락, 자기 스스로도 거슬리는지 자꾸만 귀 뒤로 넘기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한참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다가, 꼴보기 싫다 라고 말해버렸다.
그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이나 조용히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더욱 실수한 것처럼만 느껴졌다. 술집은 소란스럽고, 주변 사람들은 얼큰해져서 한참이나 시끄러운데, 그와 나 사이만이 들새의 숨소리마저도 느껴질 정도로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아, 그래요, 정도만 되돌려줬을 뿐, 무언가 상처를 받았다거나 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잊어버렸다. 내가 왜 그날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나서. 우연히 길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나는, 처음엔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머리가 아주 바짝 깎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혹시나 내가 했던 말 탓인가 싶어서, 숨죽여 아는 척했다. 그런데 그는 그냥, 어느 날 씻다가 머리 말리는 것이 갑자기 귀찮아져서, 집에 있는 아무 가위로 잘랐다가, 더 이상해지는 바람에, 근처 이발소에 들어가 남은 머리를 쳤을 뿐이라고만 했다...
나는 그 짧아진 머리 탓에 드러난 뒷덜미와 옆턱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멍청하게 잘 어울린다,는 한마디만을 내뱉고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니 그가 뒤돌아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죽어도 알 수가 없었다.
*
참 다르다. 첫인상. 아무래도 다르다. 두 번째 인상. 사쿠라이라는 사람. 참 답답하게 보였다. 내가 보기엔. 너무 꽉 막힌 것 같아. 그렇게 사는 게 편한가? 항상 그랬다. 조별과제도 나서서 전부 해치우려고 했으나, 독선적이지는 않으려고 일부러 한발짝 물러서는 게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은 몰랐다. 전부 모아서 제출하는 것도 꼭 기간을 하루 앞당겨 내놓았다. 교수나 조교는 의아해했다. 혹시 못 낸 친구들 있으면, 너그럽게 봐주시는 것처럼 하면 좋을 거 같아서요. 항상 웃는 얼굴. 그들은 본인들이 악한 사람이 되는 걸 꺼려했으므로. 사쿠라이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분명 구멍이 있을 테야. 나는 알아. 저렇게 완벽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어느 한 구석,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거야. 난 괜시리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자타공인 혀를 내두르며 칭찬하는 친밀감 형성법에는 도가 텄다. 조별과제 한번 끼었고, 교내 카페에서는 그의 뒤에서 주문을 지켜보았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을 느끼는 은둔 청년과도 같은 복학생 등에게도 서스럼없이 말을 잘 거는 것도, 수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신기하리만치도 개의치 않아 했다. 난 그게 오히려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이 껄끄러워하는 것 하나 없을 수 있지? 하릴없이 걷다가. 그가 야밤에 대학가에서 세 걸음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꽐라를 일으켜 세우고, 굳이 편의점에 가서 비싼 천연수를 사다가 마시게 하고, 손에 쥐여 주고, 자기 돈으로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까지 보고는. 학을 뗐다. 저거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 절대 아닌데.
그런데 참 구멍이 없다. 그는 언제나 방긋방긋 웃으며 다녔다. 아하하 일부러 귀 뒤로 머리를 꽂아넘기며 그 앞을 지나가는 여학우들. 그는 놀라울 만큼 눈치가 없으므로 그정도로는 플러팅에도 끼워 줄 수 없다. 자신의 권력에 보탬하기 위해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농구대회라도 보러 오라고 하는 체육계. 바보들. 그는 따지자면 축구파다. 슬램덩크 세대니까 농구를 싫어하지는 않겠지만. 웃으며 어깨동무를 풀고는, 라인으로 날짜와 시간을 알려 달라고 한 뒤, 아주 산뜻하게 자리를 먼저 떴다. 전화를 받겠다는 제스처로, 눈썹을 팔자로 한껏 젖힌 뒤, 미안하다는 것처럼 손을 흔들며, 대단히 깍듯하게 전화에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그래 바보들아. 그는 그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아. 너네처럼 뇌세포까지 근육질이 된 바보들이랑 어울리느라 허송세월 보낼 사람이 아냐.
그가 구석에서 통화를 마치고 지나가는데 전공 교수가 살갑게 말을 걸어 온다. 자세하게는 알 도리가 없지만, 낌새가 대학원에 오라는 권유일지도 모른다. 일전에 연구 테마가 자신 연구실과 굉장히 겹친다면서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던 걸, 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렇게 잘난 듯이 그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내뱉고, 주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평가하고 있지만.
나, 그와는 전혀 친하다고도 할 수 없고. 이렇게 본다면 한낱 스토커. 그러나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냐.
처음 그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건. 분명 그에게도 허점이 있고 구멍이 있고 옅은 면이나 약한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다. 혼자 있는 곳에서라도 보여주지 않을까 해서. 짜증 낸다거나 성가신다는 듯한 표정, 단 한 번이라도 보여 준다면, 나는 그가 충분히 성인이 아니고 그저 인간이라는 것에 만족하고 뒤돌아 설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거의 반 년 넘게. 한 학기 내내 그를 따라다녔는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빈틈을 보여 주지 않는다. 왜 보여 주지 않는 거야? 다른 사람 모두에게 그렇게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말 테야? 자신의 진실된 속내 같은 거,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난 그런 못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어떤 친밀한 사람에게도 진실된 표정을 보여 주지 않을 거라는 의심을 하게 되고 만다. 정작 그렇게 말갛게 웃는 모습이 진짜일 거라는 속단은 한 번도 하지 못한다.
아니, 그렇게 방긋방긋 웃는 게 가짜라고는 생각한 적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그런 모습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내가 스토커라서가 아니고. 물론 가족에게도 저렇게 언제나 착한 성자처럼 구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완벽하고. 동기들의 어록에 따르면 왕자님이나 다름없고.
사람이라면 여러 모습이 있어야 하잖아. 이런저런 구석이 있기 마련이잖아. 저렇게 사회적인 면모가 있다면, 저런 페르소나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말했는데. 친한 누나가 졸업을 위해 3학점짜리 강의를 들으려고 한 학기를 쓰면서, 남는 시간에 나와 시간을 때우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뭐라는 거야? 너 걔 좋아하냐?
그럴 리 없잖아! 난 이상한 사람 보면 어쩔 수 없이 흥미가 생긴단 말야.
그니까. 그게 좋아하는 거잖아. 야 부끄러워 하지 마. 이 학교에 사쿠라이 좋아하는 사람 널렸어. 너만 좋아하는 게 아냐.
아니, 난 그런 문제가 아니고...
그럼 왜? 너 특별취급 받고 싶어? 사쿠라이가, 모두에게는 친절하고 살갑고 왕자님 같은 태도로 대해 주는데, 너한테만 개차반이고, 욕하고, 인간 취급도 안 하는 듯한 눈빛, 그런 거 받고 싶어?
그런 거 아니야.. 누구를.. 누굴 마조히스트 만들 일 있어. 그 사람이 그렇게 취급하는 사람은 정말 인간 이하인 거잖아. 그 사람은 말야...
너 그렇게 말하는 거. 그거부터 이미 달라. 내가 보기엔. 이미 스토커고. 좋아하니깐 그렇게 따라다닌 거야. 나 이번에 듣는 교양 심리학인데.
누나 그 3학점이 교양이라고?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암튼.
누나가 말하길.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서. 그런 취급을 받고 싶어 하는 거라면 너 상종 못할 변태새끼니까 빨리 그 스토커짓으로 신고당하기 전에 접으라는 말이나 듣고 말았다. 나 그런 영양가 없는 말 들으려고 누나 술 사 준 거 아니거든요.
내가 그에게 붙어 있으려는 게 남들에겐 티가 났는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지인들은 그에게 나와 친하냐고 물었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면 귀신같이 사라지는 나의 행방을, 그에게 묻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그는 그때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지만, 그걸 굳이 다시 나에게 토로하는 이유는 솔직히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친한 척하는 것 같아서 껄끄러운가? 담뱃불을 빌릴 때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낌새를 느끼려고 했지만 그런 것도 없었고. 하다 못해 직접 물었을 때도, 그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 언제나 사랑이란 참 덧없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이었던 토가와네 첫째딸. 사아야 누나. 이듬해 결혼했구. 날 좋아한다며 답장 없는 연애 편지를 내 신발장에 수십 통이나 쏟아부은 여자애는 반년 뒤 남자친구가 생겼다 했고, 스물이 되자마자 입부터 맞춰 온, 지금 이름도 희끄무레 잊힐락말락하는 형은 얼마 뒤 외국으로 떠나 버렸다. 애 둘 기르던 옆집 부부는 결혼 이십 일 주년을 맞아 이혼했고, 죽네사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귀던 커플은 맞바람으로 헤어졌다.
내 주변의 사랑이란 언제나 그랬다. 친누나는 어찌저찌 잘 결혼했지만 그마저도 엄마아버지 같이 정으로 맺어진 부부라는 느낌이 더 컸다. 사랑이라면 누나네 부부가 조카에게 쏟는 게 더 사랑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역시 뭔가 다르다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나는, 그런 덧없고 의미없고 흥미도 없는 사랑 같은 거 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니 내가 사쿠라이에게 갖는 이 감정. 절대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궁금할 수 있잖아. 매번 이렇게 동선이 겹치는데도. 내가 스토커짓하느라 따라다니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만나게 되는 모든 곳에서, 그 사람, 정말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예쁘고 다정하고. 그럴 수 없잖아.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 싫은 것도 있고 짜증 나는 것도 있고, 불만도 있을 거 아냐. 그런데 왜 보여 주지 않아?
내가 그와 더 친하지 않아서 그런가 싶은 마음에. 일전부터 실행해 오던 친밀감 형성법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도 내 전화번호를 알았고 나도 그의 전화번호를 알았다. 구내식당에서 그는 먼저 혼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앗, 니노! 하면서 굳이 내 앞에 앉아 밥을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해졌다. 그가 도서관에서 유별나게 좋아하는 자리를 알게 된 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먼저 도서관으로 발을 떼지 못하는 그를 위해 자리를 잡아 놔 주었고, 그는 그것을 이미 안다는 듯 당연하게 그 자리로 다가왔다. 나는 아무런 대가 받지 않았고 그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보여 주지 않는다. 왜 보여 주지 않는 거야? 왜 드러내지 않는 거야? 사람의 유약한 부분 말이야. 어떻게 짜증 한 번 안 내고 삶을 살 수 있는 거야. 나는 점점 그것에 조급해졌다. 그의 바닥을 보고 싶어하는 저질이 된 것만 같았다. 코스모스 졸업을 하는 누나는 나에게 이제 슬슬 포기하라고 했지만 나는 괜시리 오기가 돋았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 그가 무너지는 모습, 보고야 말겠다고.
나는 수소문해서, 내가 모르는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들을 섭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교에 몇명쯤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소득은 별로 없었다. 혹시 전여친 있어요? 없던뎅. 내가 알기론 없어. 본 적 없어. 그런 연락 했던 적도 본 기억이 없었어. 그럼 술먹고 개꼴았던 적은? 그런 적 없을걸? 술 세잖아. 응. 글고 맨날 애들 집 데려다 주고 마지막까지 정리하고 뭣하면 계산도 자기가 다 하고. 하! 그런 왕자님이 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나는 괜시리 열이 받았다.
우는 모습이라도 본다면 어떨까 싶어서. 남들 다 울었다는 그런 영화, 공짜 표가 생겼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그러면서 나에게, 여자 친구 없냐며, 공짜 표가 있으면 데이트에 써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을 걸었다. 그러게요. 저 여친 없는 거 알잖아요. 그런 말로 퉁치면서. 콜라나 사 달라고 했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제법 꽉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아니고 옆자리의 그를 지켜보느라 영화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콜라는 얼음이 다 녹아 탄산도 사라지고 엄청나게 밍밍해져 있었다. 사람들이 울지 않는 구석에서 그는 조용히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에게 방해가 되리라 생각했는지 얼굴을 닦지도 않았다. 화면이 밝아지는대로 그의 얼굴도 밝아졌고. 덕분에 얼굴을 따라 흐르는 눈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나에게 그 영화, 단 하나도 슬프지 않았는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에 불이 켜지고 소란스러워지며 사람들이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지개를 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보인다.
울었어요?
응, 슬프던데, 사람들 말처럼. 니노는 안 울었어?
네. 별로. 약간 집중을 못했나 봐요.
으음.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영화 보여 줘서 고맙다면서 그는 역까지 같이 가 주겠다고 했다. 난 여자도 아닌데 그런 배려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는 요즘 흉악 범죄를 예로 들면서 괜시리 나를 겁주려는 듯한 말까지 뱉었다. 알겠어요 그럼.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먼저 넘어섰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에게 이제 됐으니 가라 손짓했다. 사쿠라이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발을 꿈쩍 하지 않았다. 얼른 가요! 난 입을 크게 벌려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그가 등을 돌렸다.
그런데 나, 갑자기 그가 등을 돌릴 때, 괜히 섭섭해지기 시작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만 뒤돌아 봐!
하는.
그럼 내가 왜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는지. 왜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는지. 왜 친해지려고 했는지. 왜 담뱃불을 빌렸는지. 왜 도서관 자리를 맡아 줬는지. 왜 혼자 밥 먹는데 방해당해도 군소리 안 했는지. 다 말해 주려고 했는데.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그날 이후로. 난 그의 약한 모습, 추악한 모습, 여느 인간과 같은 그런 바닥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나 스스로가 미워져,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나는 일부러 아랑곳하지 않은 척하며, 가끔 만나면 공부가 어려워 바쁘다고 했다. 운이 좋게도 그의 취활과 겹쳐, 그가 이런 사사로운 것까지 신경 쓰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남은 반학기는. 내가 친해지려고 하기 이전과도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 그는 취활을 하며 남은 강의들을 들었고, 조교를 도와줬고, 교수의 권유에 생각해 본다는 말과 함께 사람 좋은 웃음으로 감사하다는 표현을 덧붙이며 교수 사무실을 떠났고, 어리버리하는 과대를 도와줬다. 도서관에서는 내가 전에 맡아 줬었던 그 자리에 항상 앉아 있었지만, 애초에 학교에 오는 날이 점점 줄었다. 겨울이 다 지났다.
그는 졸업했다. 나는 졸업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섭섭하다는 연락을 제법 보냈지만. 나는 등록금 버느라 바쁨ㅈㅅ 같은 말들로 그들을 떨쳐냈다. 대부분은 그런 변명 아닌 변명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 더 나를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그런 연락들 사이에 사쿠라이 쇼 이름 하나 없는 게 괜시리 속상했다. 내가 먼저 다가가놓고 내가 먼저 멀어졌는데. 이기적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동창회 같은 거 아니면 만날 일도 없을 테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해 겨울. 내가 졸업할 수 있을지 없을지 머리를 한참 굴리고 있을 때. 술자리가 잡혔다며 내 팔을 나꿔챈 누군가에 이끌려 이름 모를 대형 이자카야에 몸을 쑤셔넣게 됐다. 나 바뻐. 그렇게 말했지만 무시당했다. 에이씨. 하루 정도 뭐 어떠냐. 그런 생각에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친한 사람들과 테이블을 만들어서 근황에 대해 얘기했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반 년, 일 년도 못 만난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오늘 무슨 날인가. 그러나 그런 자세한 것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단체로 사와를 한 잔씩 더 주문하자마자...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쇼군이다! 에 진짜다. 직장인처럼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쿠라이 쇼. 그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눈을 피하려고 구석으로 더 들어가서 모른 척했지만 그게 말처럼 될 리 없었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마련된 자리로 가면서 그는 손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별로 특별한 표정은 짓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그 표정. 사람 좋은 웃는 얼굴. 우리 모두를 보면서 오랜만이라는 듯 웃어주고는, 제일 상석 같은 자리에 가서 자연스레 앉았다. 가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내 옆자리 시무라가 속삭였다. 저거 개비싼디. 그렇게.
난 내내 이 테이블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척했지만 모든 신경이 그가 앉은 테이블에 향해 있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날카로운 줄 몰랐는데. 옆에서 말을 걸던 시무라가 열받았는지 내 입에 에다마메를 쑤셔넣었다. 미친놈. 말 좀 해라. 초상났어?
사람이 제법 많이 있었던 1차가 정리되고. 2차 갈 사람? 열댓명 되었다. 시무라, 나, 사쿠라이를 포함해, 주선자 셋을 합쳐. 자연스럽게 나와 사쿠라이는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난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피하려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아까와 같이. 그런데 그는. 내 앞자리에 떡하니 앉았다. 주선자인 사카키가 난처한 듯 보였지만. 이미 웃으며 나마 네 잔을 종업원에게 부탁한 사쿠라이를 다시 자신들의 테이블로 불러낼 여유가 없을 듯해 보이자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난 모른 척했고. 그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사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이발소에 가지 않았고. 덕분에 머리가 한참이나 길어서 시도때도 없이 머리를 귀 뒤에 꽂아넣었다. 마치 버릇처럼. 이렇게 한다면, 내가 예전에 비웃었던, 그런 여학우들처럼 되는 꼴이었지만. 지금은 재고 따질 게 아니었다. 그와 말하기 싫은 탓에 너무 빠르게 마셨고 취기가 금세 돌았다. 얼굴이 벌개지고. 눈앞이 살살 돌고 있었는데. 옆자리의 시무라는 어느새 다른 테이블에 가서, 누군가에게 엉겨붙고 있었고, 사쿠라이의 옆자리는, 화장실에 간 듯했다. 이 테이블에 둘밖에 없었다. 그제야 사쿠라이는 나를 보며 한마디.
너 그 머리 되게 꼴보기 싫다.
그런 말을 뱉었다. 난 처음에 그가 한 말인 줄도 몰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에? 저요? 이렇게 되물으려다. 이 테이블에 나 말고는 생명체가 없었기에 아, 그래요, 이정도 말만 뱉어냈다. 시무라가 자리로 돌아오려는 것처럼 보여서, 난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담배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한 대만 피우고 오겠다 했다. 거짓말이다. 연달아 세 대 정도 피우고는.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사쿠라이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거.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바보. 듣고 있어? 제대로 말해! 칠칠맞네. 그 정도 면박이야 사람인 만큼 타인에게 자행해왔지만. 꼴보기 싫다니.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난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 앉아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시큼한 마음과, 사쿠라이가 그렇게 날선 말을 나에게 해 줬다는 일종의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돌아갔다.
또 한참을 보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나의 졸업식에 그는 오지 않았다. 난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이발소에 가서는 그냥 시원하게 잘라주세요 귀찮아가지고. 라고 했더니. 주인 아저씨가 덤으로 수염도 밀어 주면서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아 주었다.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거슬린다고 했던 긴머리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뒷머리를 쓰다듬자 까슬까슬하게도 느껴졌다. 그런데도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퇴근길에 그를 어쩌다 만났을 때. 그가 나보다 더 놀라며 나를 알아보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사람들 무리에서 갑자기 멈춰서서 욕을 먹을 정도.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아 인적 드문 골목으로 빼냈다. 어떻게 알아봤네요? 응...
머리 잘랐네?
네. 공부하다 거슬려서 그냥 집에 있는 아무 가위로 잘랐는데. 더 이상해져서 그냥 이발소 가서 잘라 달라 했어요. 그 뒤로도 계속 같은 데만 가니까... 이렇게 계속.
응... 그렇구나.
할 말 있어요?
... 아! 아니. 그냥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잘 지내죠?
응. 그렇지, 그럭저럭.
그럼 됐어요.
아, 응...
일전과 같이 말이 늘어나지가 않았다. 나도 말을 붙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왜냐하면 오늘 발매인 게임이 집에 도착해 있다는 메일이 왔기 때문에. 그도 이상하리만치 말이 길어지지 않았다. 퇴근길이라 기운을 다 써서 그런가. 난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의 시선을 한참이나 피했다. 사쿠라이 쇼 답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잘 어울린다. 그는 나에게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못할 말이라도 한 듯, 쫓기듯, 다시 골목을 빠져나가 사람들에 뒤섞여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난 그 뒤통수를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지하도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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