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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4. 05
얼레?
라이터 부싯돌을 열댓번이나 누르다 손에 화상을 입을 뻔한 니노미야가 짜증에 못이겨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근데 머리색이... 머리가 존나 노랗다...
분명 마지막으로 본 사쿠라이는 먹물에 여든세 번 담갔다 뺀 듯한 시꺼먼 머리였는데... 맥주로 탈색한 것처럼 별로 예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양아치 같은 금발이었다. 한달 반치 뿌리염색이 밀린 니노미야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필터가 축축히 젖어가다 담배가 막 투신하려던 무렵 사쿠라이가 손을 쭉 뻗어 불을 켰다. 팅하고 쇠통이 울리는 소리가 청명하게 났다. 우리 또래 중에선 절대 쓰는 걸 본 적 없는 지포라이터였다. 얼핏 각인 같은 게 새겨져 있는 듯도 한.. 니노미야의 집엔 당구장 피씨방 가라오케 캬바클럽 이발소 등에서 오십엔 주고 사거나 훔쳐온 일회용 기름라이터만이 가득했는데.
“뭐해? 빨아”
“엣. 어 앗.”
호흡을 잘못해서 초짜마냥 연기가 목에 걸려 기침을 뱉었다. 사쿠라이는 그런 니노미야를 어쩐지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괜히 쪽팔려 모른 척하고 마저 담배를 피웠다. 오랜만에 봐서는 처음 나눈 말이 이따위라니. 여태 뭐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듯했다. 니노미야는 궁금했다. 왜 오랜만에 여기 있는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사쿠라이는 길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횡단보도를 몇걸음만에 걸어온 남자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더니, 오래 기다렸냐는 말에 방금 왔다는 개뻥을 치면서 멀어져갔다.
그런데 그 남자 어쩐지 익숙하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막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니노미야는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에 앗뜨거! 하고 소리를 질렀다. 꼴사납게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길.
몇년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날 그때 이후로 미친 척하고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니 잊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답지 않게 손을 벌벌 떨어가며 했던 고백은 무슨 말로 거절당했더라.
그 말은 잊을 수가 없었다. 사쿠라이는 그 고백 이후로 동네에서 사라졌으니까. 물론 그 고백 탓은 아니겠지만.
'너 귀가 빨갛다'
'근데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너도 다른 사람 좋아해봐 나같은 건 말고'
그런 개같은 말
그러니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 풀리게 만드는 그 남자가 바로 '좋아하는 사람'인 거지.
안 그러냐? 니노미야 옆엔 벌써 잔이 너댓개였다. 그마저도 알바생이 이미 몇개 치운 이후였으니 얼굴이 벌개진 니노미야는 몇십분 전부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평소라면 포지션이 정반대일텐데. 아이바는 테이블에 고개를 금방이라도 처박아 쓰러질 것 같은 니노미야 옆에서 몸으로 받쳐주면서 그렇지 그렇지, 하며 대답했다. 슬슬 팔이 저린데 집에 가고 싶지 않나? 아직은 웃는 낯으로 니노미야를 배웅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게로 들어온 건 역시 이미 한잔 걸친 듯한 얼굴의 사쿠라이였으므로 아이바는 앞뒤 따지지 않고 사쿠라이를 불러다 앞에 앉혔다.
“잘됐다! 사쿠라이군, 진짜 오랜만이네? 온 줄 몰랐어! 왔으면 인사라도 할걸. 저, 내가 집에 가봐야 하는데 니노가 일어날 생각이 없어서, 괜찮으면 같이 마시다가 길바닥에 버려둘래? 죽진 않을 테니까. 계산은 얘가 한다고 했거든. 알아서 지갑에서 돈 꺼내다가 계산해. 정말 미안! 내가 나중에 밥이라도 살게.”
니노미야가 한줌의 제정신이라도 움켜쥐고 있었다면 그렇게 떠나려는 아이바를 붙잡고 너 대가리에 총맞았냐며 몇년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근원적 폭언을 쏟았을 테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의 니노미야에겐 그럴 정신은 없었다. 뒤로 넘어지지 않게 니노미야를 앞으로 잘 앉혀두고 아이바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더 붙잡혀 있었다간 큰일날 뻔했어!
지금 그곳에서 더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아하? 이게 누구셔. 말도 없이 튀었다 말도 없이 돌아온 그분 아니신가. 정말 반갑습니다!”
“너 많이 취했다?”
니노미야는 정말 반갑습니다! 라는 말에 맞춰 벌떡 일어나 고개까지 숙여 인사하려고 했으나 머리가 무거워 일어서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다시 한번 테이블에 처박았다.
“그럼요. 누구누구 덕분에 어엄청 마셨지요.”
“그래? 그 누구가 나야?”
검지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킨 사쿠라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니노미야는 따라 웃으며 잔을 꺾었다. 웃음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그 뒤로 니노미야는 쥐죽은듯 조용했다. 남은 잔만 다 마시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걸 또 희한하다는 듯 바라보며 사쿠라이도 두어잔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바가 분명 니노미야의 지갑을 꺼내 쓰라 했지만 사쿠라이는 자기 지갑을 찾았다. 그러나 계산은 하지 못했다. 어느새 뛰쳐나와 딱맞춰 돈을 내민 니노미야 탓에 사쿠라이의 지갑은 열리자마자 다시 닫혔다.
“저어, 나 집에다 좀”
“내 옷에 토하지만 않으면.”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니노미야는 잘만 걸었다. 그냥 사쿠라이의 옆에 딱 붙은 채로 걸었을 뿐. 열쇠도 헛손질하지 않고 잘 끼워넣었다.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려고 했는데 사쿠라이는 팔 언저리를 붙들렸다.
“하고 싶은 말 있지?”
“아니 그. 음..”
물어봐놓고 대답도 듣지 않는 건 무슨 싸가지? 입술이 부딪힌 채로 사쿠라이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소리가 먹혀서 아무도 듣지 못하겠지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신발이 벗겨진 채 침대인 듯한 곳에 눕혀져 있었다.
“저, 나 눈치가 나쁜 편은 아니라,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뭐라고 부탁하려는지 안다고?”
사쿠라이는 약간의 헛웃음을 동반한 채 말했으나 말하자마자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진다.
“맞네? 부탁하려는 거.”
“뭐 부탁하려는 줄 알고?”
“그거까진 모르지. 그냥 뭐 원하는 게 있나 해서 찍었는데”
이렇게까지 됐는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엔 그정도로 매몰찬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쿠라이는 가볍게 티셔츠를 벗었다. 취해서인지 다른 탓인지 니노미야는 침을 삼켰다가 시선을 날것의 상체로 옮겼다.
“뭐냐 이거.”
막 티셔츠를 벗고 누운 사쿠라이 배 한가운데에 못 보던 게 박혀 있다. 박혀 있다? 보통 사람 배엔 배꼽 정도가 있는 게 정상 아니던가. 니노미야는 손끝으로 그 끄트머리를 틱 튕겼다.
“걸레같다”
살없이 마른 배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니가 더.”
시선을 배에서 얼굴로 돌리니 그제야 귓불에 달려 있는 작은 은색 고리가 눈에 들어온다. 피어싱? 사쿠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에 박혀 있는 건 니노미야도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그때 좋아하던 형이랑 나눠 낀 피어싱이다. 왼쪽에만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저건.
그걸 아직도 달고 다니냐? 새거 좀 사라, 하고, 니노미야는 욱해서 한소리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근데 배에 이건 첨 본다. 배꼽에도 피어싱을 하냐. 자꾸만 손으로 배꼽 위 얇은 살을 뚫어내 매달려 있는 보석을, 분명 진짜 보석따위 아니겠지만, 니노미야가 만지작대자 거기 붙어 있는 그 얇은 살이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아문 지 한참되었기에 아픈 건 없었지만 불유쾌한 기분에 사쿠라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왜”
“지금 이런 행동.”
바지를 벗기 전에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니노미야는 코웃음치며 대꾸했다.
“내가 뭐했는데.”
“방금 지갑에서 콘돔 꺼냈지”
언제 봤대. 니노미야는 지갑도 바닥에 던지며 이마를 긁었다.
“그건 돈 들어온다 해서”
그런 미신을 믿니? 하는 눈빛이었다. 떠나기 전까지 사쿠라이는 복권 한장 사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니노미야는 그런 눈빛쯤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원래 술에 취하면 잘 안 서는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콘돔을 씌웠다. 사쿠라이의 바지를 벗겨내려고 하는데 엉덩이에 걸려 벗겨지지 않았다. 좀 들어 보라는 뜻으로 쳐다보자 그제야 허리를 들어 줬다.
“그리고 이빨로 뜯는 거”
“손보다 이로 뜯는 게 잘되는데 어떡하라고.”
벗겨낸 바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어느 모텔에서 가져왔던 일회용 젤을 찾아 들고 돌아오며 니노미야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틀린 말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몰라 암튼 넌... 넌 뭔가 너무 닳은 느낌”
그게 지금 다시 만난지 두번만에 할 말이냐, 하려다가, 뭐래, 한마디로 끝내려고 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좀 둔하긴 해도 보는 눈은 의외로 좋단 말이지.
“교환환불 안 될 거 같은 느낌”
어느새 위아래로 전부 벗겨진 사쿠라이는 취기가 이제야 올라오는지 시답잖은 대꾸에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니까 그말은 나더러 걸레같다, 그뜻이지, 그런 건 숨기고 싶었는데.
“뭐라냐”
“넌 중고상품이야”
“니는 뭐 신삥이야?”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하자”
“아다냐?”
사쿠라이의 목 언저리가 시뻘개지기 시작했다. 정곡을 찔렀나보네. 그렇다면 부탁은 그런 거였겠지. 초짜인 티는 안 나게. 근데 닳은 것처럼은 안 보이게. 욕심 존나 많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는 그냥 아껴둔 거야.”
이미 그렇게 보일 수 없는 사람으로 넘겨진 니노미야는,
“누굴 위해서?”
그럼 아주 순진하지만 바보처럼은 보이기 싫은 사쿠라이를,
“사사키상을 위해서...”
원하는대로 보이게끔 손대주기로 한다.
니노미야의 고백을 들은 사쿠라이는 그때 열아홉이었고 니노미야는 막 열일곱이 되었다. 새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상경한 사쿠라이는 방학에도 본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니노미야는 열일곱에 처음 여자랑 잤다. 옆집 누나였다. 그 뒤로는 나이 위아래 성별 두개 가리지 않고 하자고 하면 섹스했다. 니노미야더러 닳아빠진 걸레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실인걸. 그게 틀린 것도 아니잖아.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닌데, 이런 동네에선.
첫사랑에게 처음 전한 첫 고백은 아주 볼품없게 버려졌으니, 다음 사랑을 광이 나게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쿠라이가 사라진 몇년간 니노미야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마도 '우리 사귀었어요? 언제부터?' 일지도 모른다. 얻어맞은 정강이엔 멍이 오래됐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도 대주라는 예수의 말은 의도치 않게 실현되어갔다.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길 소원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길 기도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애정이 갈 곳 잃기를 원한다.
누군가의 첫사랑도 중간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니노미야는 그런 마음만 앓았다.
“그래서 이것도 아직도 끼고 다니는 거야?”
한손은 아래에 한손은 위에. 왼쪽 귓볼에 작게 빛나는 피어싱을 콱 움켜쥔 니노미야는 물었다.
“아파 누르지 마.”
어느 쪽이든 당장은 고통이 쾌감을 앞서는 사쿠라이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고통을 거절했다.
“물어봤잖아. 대답을 해.”
“그래 아직도 좋아하니까, 바보처럼 보이기 싫으니까 이러고 있지,”
“뭘? 지금 나랑 섹스하는데”
“니 그런 점이 특히 걸레같아...”
그 뒤로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사쿠라이만이 먹힌 듯 토해내는 신음만을 뱉어냈다. 듣기 싫어서 입을 막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니노미야는 사쿠라이가 원하는대로 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마음 하나만은 그대로였는데, 어쩐지 닳았다는 말을 사쿠라이의 입으로 들으니 그 마음까지 간지러워져서 맘껏 긁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긁으면 피가 보일 때까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마음을 모른 척했다.
사사키상과 사쿠라이는 자주 같이 있었다. 둘이서만 같이 있을 때도 있었고 무리들과 있을 때도 있었고 경우는 다양했으나 밤에만 만나게 되는 사쿠라이와 니노미야보다는 확실히 많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니노미야는
사사키상 호모입니까?
하고, 사쿠라이가 없는 틈에 정중하지만 예의없게 물었다. 어차피 이 동네 사람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자기소개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대답은 다정한 웃음과 아구창 한번.
원래는 사쿠라이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사사키상 남자 안 좋아한대. 바보같이 고백 한번 하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는 꼴이 남들 보기에 우스울까 싶어서. 그걸 몰라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니 대신 물어본 셈 치고. 얼음주머니를 얼굴에 올린 채 니노미야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번번이 마주친 그 모임을 지켜보면서, 지켜보다가,
니노미야는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단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버린 게 누구인지. 그 사람이 남자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몇 년 전 우정을 빙자해 나눠 가진 피어싱을 알아주지도 않는데 여태껏 끼우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줄 수 없단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저렇게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을.
405호 싸우고 섹스하고 싸우고 섹스하고..
마치덜진화된유인원들이주위신경
안쓰고자기할일만하듯이요ㅎㅎ
하지만어쩔수없죠
생산활동은'짐승'의본능인걸요^^
1층에 도착해서도 한참이나 그 종이를 쳐다보던 니노미야는 5층까지 강제로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동안 계속 그 글자들을 바라봤다. (솔직히 뭔소린지 이해가 잘 안 돼. 난 걜 사랑하지만. 걘 내가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걸. 이건 생산활동도 짐승도 본능도 아닌데) 두번째로 1층에 도착했을 때 니노미야는 얄팍하게 붙은 에이포 종이를 확 잡아뜯어 구겼다. 쓰레기통에 집어던질까 하다가 그냥 그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몇번 싸우고 섹스한 뒤에 사쿠라이는 뻔뻔하게 사사키상의 이름을 불러도 되냐고 했다. 니노미야는 어이가 없어 지금 니 구멍에 좆 비비고 있는 사람은 나입니다, 라고 말해주었으나 고개를 베개에 파묻은 사쿠라이는 지금 얼굴 안 보고 있으니까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 뒤로 사쿠라이는 이제 완전하게 죄책감 하나 없이 니노미야를 대타로 생각했다. 술이 없어도 섹스할 수 있었다. 그건 니노미야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본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너는 말야. 넌 짐승이야. 나한테 마음 하나 없어도 내가 빨아주면 발딱 세울 수 있고 내가 박아주면 좋다고 우니까. 니가 좋아하는 남자한텐 절대 박힐 일 없으니까 날 무슨 대용, 대신, 대체품, 그런 걸로 생각하나본데 전혀 달라. 이런 징그러운 짓. 세상에서 너밖에 하지 않아. 너는 정말 못된 사람이야....”
“그러는 넌 날 좋아하지도 내가 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야한 생각이나 잠깐 하면 발기할 수 있고 구멍이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좋다고 들이밀 거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너도 어차피 남자면서.”
그런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섹스하는 건 빼먹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에이포가 생각났다. 어쩌면 짐승 정도는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이 정도까지 와버렸으므로 더이상 두 번째 고백따위 할 수 없고, 아직도 유효하는 첫사랑에 대해서는 죽어도 말할 수 없으니 입 닥치고 이정도에 만족해야 하는 거라고.
새벽 중 잔뜩 취한 사사키에게 전화를 받은 사쿠라이가 니노미야를 팽개치고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채 뛰쳐나간 날 니노미야는 울었다. 집이 너무 추워서 덜덜 떨었다. 7월인데 감기라도 걸릴 것처럼 추웠다. 방금 전까지 나랑 섹스했지만 날 사랑하지 않는 사쿠라이가 야속해서 니노미야는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처럼 몸을 들썩이며 한참을 울었다.
다음날 사쿠라이에게 신발을 되돌려받으러 갔을 땐 이상하게 아무 기분도 들지 않았다. 니노미야의 오른쪽 체커보드와 사쿠라이의 왼쪽 올드스쿨. 사쿠라이는 그렇게 신발을 주워 신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새벽에 가로등이 듬성듬성 켜진 골목을 달려나간 거다. 그 사람 전화 한통에.
내가 더 좋아하는데. 내가 더 사랑하는데. 난 너를 사랑해 줄 줄 아는데. 널 사랑해 줄 수 있는데. 왜 그 사람일까. 왜 사사키일까. 왜 내가 아닐까. 내가 사랑하게 해놓고 왜 날 돌아봐주지 않는 걸까.
사쿠라이의 집에서 신발을 바꿔 신고 가지런히 돌려놓은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니노미야는 돌아가는 길에서 전날 밤처럼 엉엉 울었다. 울다가 술집에 들어가 술을 진탕 마시고 가로등 밑에서 잠들었다. 새벽에는 비가 왔다. 쫄딱 젖은 채 집으로 돌아가 다시 또 울었다. 사쿠라이가 다시는 이 집에 어떤 일로도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몇년이 지났다. 둘은 이제 길거리에서도 모른 척했고 담뱃불도 빌려주지 않았다. 니노미야는 사쿠라이가 집에 놓고 간 그 지포라이터를 계속해서 기름을 넣어가며 썼다. 비싼 지포라이터를 잃어버렸는데도 사쿠라이는 되찾으러 오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던 건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지포라이터를 쓰는 걸 봤으면서도 사쿠라이는 되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한량짓은 청산해야지. 니노미야는 백수짓을 접고 중소기업 영업직으로 취직했다. 사쿠라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의 유예기간을 지낸 뒤 대학원에 갔다. 사사키는 결혼했다. 니노미야도 사쿠라이도 그에게 청첩장을 받았다. 니노미야는 결혼식장에 가서 그 괘씸하고 조그만 뒤통수를 열렬히 찾았으나 사쿠라이는 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에 축의금만을 들려 보냈다. 멍하니 담배를 태우다 얻어듣기로는 지도교수가 불러내서 오지 못했다고 했으나 니노미야는 그게 거짓말인 걸 알 수 있었다. 떠나기 전 사사키는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사쿠라이가 오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우스웠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저런 얼굴은 보지 못하는 사쿠라이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사사키의 결혼식장에 온 자신이 가장 우스웠다. 여기까지 와서도 사쿠라이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무엇보다도 우스웠고 초라했다.
이제 어린애들처럼 운동화를 신을 땐 지났다고. 상하지 않는 마음을 어딘가로 던진 채 니노미야는 새 구두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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