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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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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2023. 06. 01.
下 2023. 06. 14.












미움을 사는 것엔 익숙해졌다. 이유 없는 멸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 있었다. 옆에 다가오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쩔 때는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웃지는 않았다. 웃으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까. 실은 내가 아니라 어떤 누구가 됐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특별히 장단을 맞춰 줄 생각따위 없었지만 또 괜히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얌전히 당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애들은 너무 어리다. 나서서 말리지 않는 급우들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애들도 똑같이 어리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자신이 당하는 게 무서우니까 다들 다물고 있을 뿐. 차라리 동조하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없는 사람인 척, 모르는 척, 자신들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애써 무시하는 고등학생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책상 서랍에 손을 넣었더니 정체 모를 찐득한 무언가에 당하거나 바닥이 축축한 화장실에서 넘어지거나 할 때는. 그애들만큼이나 어린 나도 무언가를 괜시리 탓하고 싶어진다. 할 수 있는 것은 냄새가 나지 않게 비누로 닦아내고 말리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 할 거 아니냐? 언젠가의 저녁 시간에 무관심한 아버지가 술김에 뱉은 말은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그러니 학교를 그만두거나 할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성적이 바닥을 기어도 졸업장을 받는 건 포기할 수 없었다. 복도에서 우유를 맞거나 실내화에 압정이 깔려 있거나 하는 것은 너무나도 뻔하고 유치해서 우스웠고 웃음이 났지만 어디선가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그 치들은 웃음에 민감했으므로 사쿠라이는 내내 무표정이었다. 수업은 들어도 들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칫하면 죽도록 얻어맞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과 사의 문제에 학업은 언제나 뒷전이다. 그래도 어디선가 날아오는 실내화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눈앞의 교과서에 집중하고 싶다. 무엇에 기분이 상했는지 비위를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산수를 한 번 더 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음울한 얼굴로 변모한 사쿠라이에게는 선생들조차 최소한으로 말을 걸었다. 그런 선생들이 신경 쓰게 하지 않도록, 눈에 거슬려 상담실에 불려간다든가 사건의 전모를 뱉을 수밖에 없는 일은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학교는 빠지지 않았다. 점심은 문이 닫힌 옥상에서 해결했다. 누운 채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던 날이 훨씬 많다. 니노미야와는 어느 날 그 먼지 날리는 옥상에서 처음 만났다. 얼굴을 마주치고 나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이 학교에 자신과 같은 존재는 하나 더 있다는 말이. 똑같은 꼴이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동질감의 냄새를 맡았다. 우리는 말 없이 반찬을 바꿔 먹었다. 점심 시간마다 만나게 됐다. 바나나우유과 초코우유를 바꿔 먹는 날도 있다. 메론빵과 크림빵을 반반 갈라 나눠 먹을 때도 있다. 어느 날은 니노미야가 주머니에 말아넣어 가지고 온 야한 책을 돌려 봤다. 이거 그녀석들에게 들키지 않았어?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먼저 앞을 세운 니노미야는 약간 발갛게 익은 얼굴로 다가왔다. 너 그거 알아? 같이 비비면 더 기분 좋대. 그날 니노미야는 등교하자마자 다 찢어진 교과서를 하나 버렸고 교실 뒷문을 열었다가 알 수 없는 액체가 들어 있는 물풍선을 맞았다. 너도 마음이 상했어?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무릎을 세운 채로 앉아 있던 사쿠라이는 니노미야를 올려다보며 거절은 하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렸지만 모른 척도 하지 않았다. 사쿠라이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켜 세운 니노미야는 알아서 바지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내리고 속옷을 젖혔다. 혹시 어디선가 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잔뜩 긴장했지만 당장 니노미야는 그런 것쯤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조용한 신음을 내뱉었다. 반대쪽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누구 것인지 모를 정액을 아주 꼼꼼히 닦아내는 니노미야는 그때만큼은 괴롭힘과는 아주 거리가 먼 듯했고 우리 둘은 타의에 밀려 도망온 게 아니라 스스로 옥상에 걸어온 듯했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손수 사쿠라이의 바지 지퍼와 단추까지 채워준 니노미야는 한가지를 제안했다. 너 그거 알아? 입으로 해주면.. 그날 이후 니노미야가 점심시간에 뒷문에 찾아오면 옥상이 아니라 화장실로 향했고 찾아오지 않으면 옥상으로 갔다. 괴로운 일상에서 둘만이 벗어나기로 했다. 30분이 될까말까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탈로는 충분했다. 대신 사쿠라이가 제안했다. 학교 안에선 모르는 척하자. 니노미야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몇주 지나고 교사 구석 사람이 오지 않는 아주 외진 화장실에서 입을 헹구며 사쿠라이는 학교가 아니면 서지 않느냐며 모욕에 가까운 모독을 뱉었지만 니노미야는 그 옆에 서서 또 말없이 손을 닦았다. 그치만 니가 학교에 있잖아. 그러니 서로는 서로를 위해서라도 결석하지 않았다. 이 텅 빈 학교에 서로가 아니면 등 붙일 구석이 없다.

책상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린다. 주번이 자물쇠를 쩔렁일 쯤에서야 느즈막히 가방을 챙겨 복도로 나오고, 그런 사쿠라이를 여전히 유령 취급하는 주번이 열쇠를 교무실에 가져다두러 갈 동안 또 복도에 가만히 서 있는다. 부활동은 하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이 얼른 교문을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린다. 그렇게 할 일 없이 시간을 죽이다가 왁자지껄함이 시들면 자전거들의 무덤으로 발을 돌린다. 실은 그리로 가지 않아도 된다. 먼저 모른 척하자고 제안한 건 사쿠라이 쪽이다. 주차장 뒤에 있는 후문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면 니노미야가 자전거를 대고 서 있다. 서로 여전히 말은 없다. 사쿠라이는 니노미야가 말하기 전에 이미 뒷자리에 앉아 있다. 무게 탓에 휘청이는 자전거를 발로 밀어 바퀴를 굴리고는 반대쪽 다리를 안장 너머 페달에 둔다. 애초에 이 마을은 사람이 적다. 학생은 더욱 적다. 학교가 여럿 모여 있는 구역을 지나면 곧 논밭이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은 계속 이렇게 넓고 푸른 들판뿐. 페달을 밟는 니노미야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을 흔들리는 자전거 위에 올라타 있다. 물냄새라고는 논에 대놓은 농업용수 냄새뿐. 그마저도 푸릇한 풀냄새에 뒤덮여 잘 느껴지지 않는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 자전거가 덜컹인다. 처음 자전거를 얻어 탔을 때에는 금방이라도 자전거에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자신보다도 왜소하게 느껴지는 니노미야에게 신체를 맡기는 게 못 미더웠다. 어느 날은 마주오는 사람 탓에 잠시 자전거를 세웠을 때 뒷자리에서 내려 그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나 그냥 걸어갈게. 왜? 넘어질 것 같아서. 안 넘어져. 장담해? 나 자전거 배운 뒤로 넘어진 적 한 번도 없는데. 나 타면 무겁잖아. 어 무거워. 근데 안 넘어져. 넘어질 것 같다고. 안 넘어진다고. 여기 빠질 것 같다고. 안 빠진다고. 사람은 이미 둘이나 지나쳤는데 둘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실랑이를 했다. 오늘 가다가 넘어지면 앞으로 타라고 안 할게. 그 말에 넘어갔다. 니노미야의 말대로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고꾸라질 듯한 기분에 니노미야의 등에 얼굴 앞면을 확 묻고 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은 채로 자전거를 탄 적도 있다. 갈림길에서 사쿠라이를 내려준 니노미야가 금세라도 질식해 죽을 사람 얼굴을 하길래 감은 팔에 힘을 주는 것은 점점 그만뒀다. 사방을 둘러봐도 매번 익숙한 동네.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맞부딪히는 들풀들. 교차로를 두 번 지나고 전철을 지나면 헤어지는 갈림길이다. 뒤돌아 각자의 집으로 갈 때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안녕 안녕. 그 안녕이 어떤 안녕일지 몰라서.

자전거 뒷자리에서 내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조금씩 들이키는 술의 양이 늘어나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고 주말엔 그 아버지 옆에 마르고 피곤한 어머니가 병원 냄새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탓에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병마라는 건 그렇게 가족을 좀먹어갔다. 낫든지 낫지 않든지. 건강해지든지 그렇지 않든지. 어린 동생은 영문 모를 병에 걸려 일년 조금 안 되게 병원에 처박혀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쿠라이는 병문안을 그만두었다. 그 어린 동생이 형조차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차피 찾아가는 날 중에 동생이 눈을 뜨고 앉아 있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오지 말라고 한 것은 수발을 드는 어머니였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정도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이 줄어든 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그림자의 갯수가 달라졌을 쯤부터. 생각해보면 그녀석들에게 덜미가 잡혀 괴롭힘당하기 시작한 것도 그쯤인 것만 같다. 그러니까 보통의 청소년들과는 다른 눈빛을 하고 있어서라는 건지. 이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어쩐지 납득하고야 말았다. 동생은 일년을 꼬박 채워 앓고는 죽었다. 가족에게는 슬퍼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조문객을 받고 잘각이는 염주 소리를 듣고 도무지 내용을 알 수 없는 기도 소리를 들은 뒤 핏기가 사라진 동생의 죽은 몸을 마지막으로 또 확인하고 그 육체를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고... 학교에는 일주일을 결석했다. 니노미야 생각이 났지만 연락할 수 없었다. 

옥상에 먼저 올라와 있었는데 어느새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있을 시간이라 눈을 한참 찡그리고 고개를 젖혔다. 니노미야였다. 니노미야도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학교 왜 안 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눈을 마주쳤는데 어쩐지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대답을 한참 하지 않았는데 니노미야는 재촉하지 않았다. 동생이 죽어서. 후 불면 먼지와 뒤섞여 날아갈 정도로 가볍고 건조한 말투였다. 아. 니노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옥상에서 낮잠을 잤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선생들이 우리를 찾지 않는다는 건 그날 알게 되었다. 

동생이 죽고, 한달이 지나고, 49일이 지나고, 또 일주일쯤 지났다. 늘 사쿠라이를 괴롭히던 녀석들은 언제나와 같이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둥그런 고개를 아무렇게나 손으로 눌러 비틀었다. 거기에서 빠져나온 사쿠라이는 언제나와 같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가려고 했으나 ‘왜 나야?’라는 말은 머리보다 먼저 입으로 흘러나왔다. 한번도 반항따위 한 적 없는 사쿠라이에게서 한참만에 그런 말을 듣자 괜히 열이 받았는지 그애들은 교복 뒷덜미를 붙잡고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그래서 니노미야와 자주 들락거렸던 교사 구석진 곳으로 갔다. 가서는 사쿠라이를 흠씬 두들겨 팼다. 방금 전 한마디 뱉었다고는 생각되지 않게 사쿠라이는 맞는 내내 악소리 한번 내지 않았고 그것에 스스로 질린 양아치들은 금세 자리를 떠났다. 당연히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약간 그늘진 그곳에서 흙먼지에 뒤덮인 채 바닥에 누워 한쪽 팔로만 상체를 지탱하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사쿠라이는 입에 고인 피를 고개를 틀어 어딘가로 뱉어버리고 팔에 힘을 풀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다. 혀로 입안을 훑었다. 이대로 있어도 아무도 찾지 않을 거고.. 흔들리는 이는 없었다. 

또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아까 간 줄 알았는데. 자전거 체인 소리가 들린다. 

“뭐해?”

보면 모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방금 전 어딘가를 잘못 맞았는지 복부가 아팠다. 기침 말고는 목구멍으로 나오는 게 없었다.

“태워줄까?”

옥상이나 화장실이 아니면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아무리 구석진 데라고 해도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걸. 눈을 살짝 떴는데 해가 니노미야의 뒤로 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쿠라이는 누운 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애들 보기 전에 얼른 타.”

아무데나 버려진 사쿠라이의 가방을 주워 든 니노미야가 그렇게 말했다. 일으켜줄까? 사쿠라이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니노미야는 사쿠라이를 뒤로 돌리더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묻은 것들을 털어 주었다. 여느 때와 같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날은 그 시골 동네를 하염없이 자전거로 돌아다녔다. 하굣길에 가보지 않은 길들도 매일같이 지나다닌 길로도 핸들을 돌렸다. 해가 질 때까지. 가로등이 켜지고 갈림길에 선 것은 아마도 처음이다. 등을 돌리기 전에 니노미야는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학교 안 왔던 적 있어.”

“왜?”

“너 소문에 어둡구나. 친구 없어서.”

“지는.”

“누나가 죽어서 안 왔었어. 우리 누나는 말야. 저어기이서 차에 치였어. 그니깐.. 뺑소니라는데... 아무튼.”

수리한 지 오래된 가로등은 자주 깜빡였다. 니노미야가 말하는 동안에도 전기가 나갔다고 생각될 정도로 심하게 꺼지기도 했다. 아무튼, 이라는 말 뒤로 니노미야는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 줄줄 흐르고 있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사쿠라이는 고개를 번쩍 들어서,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안 내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게 뻔한 니노미야를 바라봤다. 한걸음 다가가자 니노미야는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다른 녀석들도 알았던 거 아냐?

니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거......





다음날은 옥상에도 화장실에서도 만나지 않았는데 자전거 주차장에서 사쿠라이를 기다리던 니노미야가 갈림길에서 자전거를 세우지 않았다. 니노미야는 자기 집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아무렇게나 자전거를 세우고 자물쇠를 잠그고 나서야 군말 없이 따라온 사쿠라이를 뒤돌아봤다. 손을 뻗어서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손목을 잡아끌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만히 서 있는 사쿠라이를 두고 가방을 뒤진 니노미야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는데 옷가지인 듯했다.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의 양 팔을 힘껏 움켜쥐었다. 우리 섹스하자. 한번만. 그건 마치 슬로모션처럼 들렸다. 무슨 뜻? 사쿠라이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니노미야는 평소라면 고개를 까딱이며 군소리를 했을 테지만 오늘은 순순히 아까 전의 말을 되풀이해주었다. 너랑 내가? 응. 여기서? 응. 왜? 누나가 보고 싶어.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의 무릎을 쳐서 쓰러트렸다. 머리가 부딪힐까 눈을 바짝 감았던 사쿠라이는 뒤통수를 만지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손에 들려 있던 옷가지는 교복 치마였다. 여태까지 아무 불만도 없던 사쿠라이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턱이 벌어지는 걸 느꼈다. 너 미쳤냐? 니노미야의 다리 사이에 깔린 채 옥상 바닥에 누운 사쿠라이는 주먹을 휘둘렀다. 무겁게 짓누르려는 몸을 밀어내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니노미야도 아까 전부터 쥐고 있던 팔에 힘을 빼지 않았다. 그걸 힘껏 흔들었다. 머리가 흔들려서 다시 휘두른 주먹은 니노미야의 얼굴을 쳤다. 실수였다. 그대로 굳은 사쿠라이를 두고 니노미야는 입에서 피를 뱉었다. 허벅지로 사쿠라이를 가둬 둔 니노미야는 손을 풀어 교복 치마의 지퍼를 내렸다. 그러니까 누나가 보고 싶은 거랑. 날 여기로 데려온 거랑. 지금 여기서 섹스하자고 한 거랑. 교복 치마랑 다 무슨 상관이냐고.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죽였다. 들을 생각이 없는 니노미야가 지퍼를 내린 교복 치마를 내밀자 사쿠라이는 어쩔 수 없이 또 주먹을 내질렀는데 니노미야의 코를 때렸다. 잠시 동안 바람도 불지 않는 듯했다. 코피가 났다. 아까 전보다도 더 뻣뻣하게 굳은 사쿠라이는 어쩔 줄 몰랐다. 니노미야가 울기 시작했다. 꼴사나웠다.

“야 한번만 입어. 부탁할게.”

손등으로 한번 콧망울을 훑어 코피가 나는 걸 확인한 니노미야는 코피를 닦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눈물은 얼마나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까.

“부탁할게. 한번만.. 입어주세요. 제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이. 갈림길에서 자신을 내려주지 않았을 때 지적했어야 했을까? 니노미야의 집 앞에 내렸을 때 나는 이제 가볼게 하고 뒤돌아 갔어야 했을까? 옥상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만나지 않았으니 자전거도 얻어 타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니 애초에 똑같은 왕따라고 너무 쉽게 경계를 풀어버린 건 아닐까? 마음대로 동족이라고 생각해버린 건 아닐까? 좆을 같이 비비면 더 흥분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넘어가버린 잘못일까? 니노미야의 뜨끈한 코피가 눈물과 더불어 번갈아 숙인 고개를 타고 불규칙적으로 떨어졌다. 그것들은 대부분 사쿠라이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방울져 떨어지는 핏물과 눈물을 맞으며 사쿠라이는 한참을 생각했다. 어디서 거절했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니노미야의 누나와 사쿠라이 자신을 연결지을 수도 없었다. 입어주세요, 라니. 여기서 존댓말이냐? 그런데 사쿠라이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미 거절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니노미야는 여전히 자신의 허리 위에 올라타 자신을 깔아뭉개며 울고 있었고 사쿠라이는 그 아래에서 멍하게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부탁한다는 말에,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쿠라이는 몇 년 전쯤의 어린 동생을 생각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동생의 더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장난감을 조립하다가 잘 되지 않아서, 양손에 가득차게 그걸 다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는, 책상에 우르르 쏟아내고, 형, 이거 도와줘! 부탁할게, 라고 했던, 몇 살인지는 생각나지 않는 동생이 기억났다. 그때 동생은 부탁이라는 말을 막 배웠던 쯤이었다. 니노미야가 부탁한다는 말을 엊그제 배웠을 리 없지만 그 말이 해마 어딘가를 뒤흔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울렁였다. 우는 아이를 혼낼 수가 없었다. 사쿠라이는 대답 대신 아주 느리게 마치 슬로모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니노미야가 그 동의를 알아채기도 전에 손에서 교복 치마를 뺏어 들었다. 몸에 힘을 풀어서 쉽게 밀쳐진 니노미야를 모른 척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지 위에 치마를 올려 입고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웠다. 반대로 바지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내리고 벗어서 가방 위에 개켜 두었다. 니노미야는 자기 교복 자켓을 옥상 시멘트 바닥에 깔아주었다. 

침을 뱉어서 성기를 마주대고 비벼대던 니노미야가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던 것도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아서 실제로 말했는지 그렇게 말하기를 원해서 헛것을 들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런 것까진 익숙했다. 왜냐하면 자주 했으니까. 니노미야가 몸을 잠깐 물리자 사쿠라이는 자기도 모르게 해줄까? 입으로. 라고 말했다. 말하자마자 후회했지만 니노미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토해진 정액으로 뒤를 풀어주는 데에 공을 들였다. 그 사실이 어쩐지 우스웠지만 웃을 수 없었다. 니노미야가 눅진해진 구멍에 성기를 갖다대자 사쿠라이는 다급하게 콘돔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주인을 모를 교복 치마는 진작 준비해온 니노미야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바짝 올라선 성기는 구멍에 빠듯하게 들어찼다. 니노미야는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 듯했지만 사쿠라이는 뭐라도 얘기해서 긴장이든 이 알 수 없는 기분이든 일단 털어내고 싶었다. 너, 해본 적 있어? 아니.. 너는. 당, 당연히 처음이지, 너, 앗.. 바보냐, 이런 거, 아, 해봤을 리가 없잖아. 미안해. 아프면.. 아프면 말.. 말해, 천천히 할게. 으응, 아, 아.. 아니, 알아서 해, 읏, 하아.. 땀과 눈물이 뒤섞여 떨어진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핏방울이 뚝뚝 번져간다. 코피가 도무지 멈추지 않는다. 사쿠라이가 교복 소매로 그걸 닦아주려고 했는데 니노미야가 뻗어진 손을 쳐냈다. 몇번 자기 손으로 피를 훔쳐냈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치면 흠칫 놀라 서둘러 시선을 치웠다. 아랫도리가 습하고 뜨거웠다. 더운 숨이 신음 소리와 함께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키스해도 돼..? 니노미야가 그렇게 물었다. 벌어진 입을 자기 입으로 막았다. 축축하고 뜨뜻한 혀가 구강을 긁어댔다. 속을 마구 어지럽혔다. 소리가 잦아들지 않을 것 같자 입으로 막은 것처럼 느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입을 맞춘 뒤에서야 니노미야는 고개를 뒤로 뺐다. 이제는 사쿠라이도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동네라서, 낮은 아파트라서, 누가 언제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움직일 때마다 외설스러운 소리만 찌걱이며 계속해서 겹쳐질 뿐 그 뒤로는 어느 쪽도 입 한 번 열지 않았다. 더해서 숨소리조차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어느 순간부터 흥분이라든가 음란 행위를 무려 야외에서 하고 있다든가에 대한 심정은 사라진 듯하고 마치 그저 욕구만을 해결하는 짐승 따위의 움직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고요했다. 

잠깐 동안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있었는데 니노미야가 먼저 미안, 하고 말을 꺼냈다. 대답이 없자 다시 미안, 이라고 하며 정리를 시작했다. 피로 물든 사쿠라이의 얼굴을 물티슈로 아주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더러워진 교복 치마를 손에 든 채 어정쩡하게 서 있으니 니노미야가 손을 뻗어서 가져갔다.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넣더니 내려가자고 턱짓했다. 사쿠라이는 니노미야의 뒤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다. 10층도 되지 않는 아파트였다. 이만 가볼게. 그렇게 말했는데 니노미야는 자기 가방을 대충 자전거 앞 바구니에 던져넣고 사쿠라이를 따라 나섰다. 데려다줄게. 어디까지? 집까지. 자전거 안 끌고 와도 돼? 걸어갈 건데.. 너 올 때 걸어오게? 아 그럼. 잠깐. 실은 그건 핑계였다. 자전거 바퀴가 구르는 소음이라도 있어야 아무 말 하지 않는 정적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니노미야는 누나의 니은자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피붙이라고는 부모뿐이었던 것처럼 누나라는 건 있던 적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삶에서 도려낸 듯 간단하게.. 그걸 눈치챈 순간 사쿠라이는 니노미야가 참으로 아득하게 느껴졌기에 허리를 껴안은 손에 힘을 더 줄 뿐이었다. 굴러떨어지지 않으려고. 자전거가 아닌 삶에서. 

난 그애의 누나를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 비참한 꼴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선명했다. 니노미야는 피투성이의 누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 니노미야의 얼굴은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 얼굴이 하루 종일 눈앞을 떠다녔다.

마지막에 흘러내린 한방울은 핏물이었는가 눈물이었는가.















그 뒤로 십년이 지났다. 참으로 지지부진한 삶이다. 날씨가 쌀쌀해질 쯤 되자 더이상 원하는 반응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괴롭힘도 점점 잦아들다가 어느새 알기 쉽게 멈춰 있었다. 많은 게 변한 것 같았지만 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파고드는 외로움도 찌를듯이 아플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무딘 날이 되는 때도 있다. 다만 옥상에서 만나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다. 이제 도피가 아니라 스스로의 발걸음. 니노미야는 점점 얼굴이 피었다. 그러나 완전하게는 아닌.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이미 알아버린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기에.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자그마치 십년. 장장 십년. 강산이 변한다는 십년. 열 손가락을 다 써야지만 말할 수 있는 햇수. 

“야 앞에 봐!”

“니가 먼저 소리질렀잖아!”

“차, 차 온다고!”

“너 지도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아? 이대로 가면 나오는 게 맞냐고!”

니노미야는 핸들을 양손으로 쥐고 조수석을 자꾸만 돌아보았다. 괜히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어 사쿠라이는 아까부터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주다 못해 이제는 아예 양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었다. 마주 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둘의 얼굴을 확 비췄다가 사라졌다. 누가 이런 데에서 상향등을 켜 사고나게! 아니 니가 앞에 잘 보면 되는 거잖아! 

이 여행을 떠나오기까지 십 년이다.




점점 피었다고 했던 니노미야의 얼굴은 다시 점점 사그라들었다. 답지 않게 기운 없어 하는 날들이 늘어 사쿠라이는 그를 닦달해 이유를 알아내고자 했지만 니노미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말 안 해. 싫어. 기분 안 나빠. 그러나 니노미야는 아직 몰랐다. 아직은 니노미야의 표정을 읽기 쉽다는 것을. 사쿠라이는 어딘가 얹힌 기분이 들어 내내 곤란했다. 그 이유를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곧 졸업이다. 그 말은 학교에서 벗어난다는 말. 다시 말해 학교였기 때문에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게 되는 날. 모두의 고삐가 일순 풀리는 날. 그러니 그런 학교에서도 갈 곳이 없어 에둘러 만났던 둘은 졸업 이후에는 억지로라도 만날 수가 없었다. 같은 동네에서 산다고는 했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고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누군가 훌쩍 멀리 떠나버릴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다시 처음처럼 돌아가 마치 남같이 어쩌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될 수도 있었다. 보여주기 싫은 곳까지 전부 열어보였기 때문에. 감추는 것이 서툴러 선을 긋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다 사쿠라이의 부모는 사쿠라이의 졸업을 기점으로 분가한다고 했다. 사쿠라이는 이혼이 한 발자국 남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조부모와 살던 니노미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하는 슈퍼에서 일할까 한다고 넌지시 말한 적이 있던 것도 같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니노미야의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던 둘은 얼어붙으려고 하는 강둑에 멈춰선다. 축축하게 보여 바지가 젖을 것 같았는데 먼저 그곳에 앉아버린 니노미야 탓에 사쿠라이도 어쩔 수 없이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뒤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앉아서 하릴없이 흐르는 강물을 언제까지고 바라보려던 니노미야는 작게 중얼거렸다.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다?”

“너 바다 본 적 있어? 난 없어. 여기 지나갈 때마다 생각해. 이거보다 더 큰 물살은 어떨지. 파도라는 건 어떻게 다가오는지. 얼마나 넓은지...”

“나도 본 적 없어.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되잖아. 여기서 가장 가까운 바다까지 얼마나......”

니노미야는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게 아냐. 가장 가까운 것과는 상관없어. 그럼 어떤 바다를 보고 싶은 건데? 사쿠라이가 물었다. 아까 전처럼 또 한참이나 얕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던 니노미야는 손을 뻗어 강 한구석을 가리켰다.

“보여? 저기 얼음 약간.”

“응.”

“저런 게 아주 크게 떠 있는 바다들이 있단 말야...”

들은 적 있다. 유빙의 바다. 세상엔 그 거대한 얼음들을 쪼개면서까지 항해하는 배들도 있다. 선뜻 가기에는 꽤 멀 것만 같고 포기하기에는 영 아쉬운 곳들에 있다는 것도. 니노미야도 그걸 모를 리 없다. 분명히 알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나중에 보러 가자. 같이.”

“같이?”

“응. 같이.”

같이, 라는 말을 니노미야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사쿠라이 쪽으로 돌리고서는 무릎 위에 얼굴을 살짝 기대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곧 졸업이잖아. 그래도 같이?”

“응. 졸업이랑 무슨 상관인데?”

“졸업해도 나 볼 거야? 계속? 지금처럼.”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지금처럼이라는 말에는 도무지 느낌표도 물음표도 붙지 않았다. 마침표마저도 왠지 간신히 달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암벽에 갈고리를 걸어 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쿠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니노미야는 그 대답에 씩 웃었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

자전거에 다시 타지 않고 끌고 가면서 둘은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묻어두었던 미래라는 것에 한발씩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도쿄로 가시고 엄마는 여기 계실 것 같아서 따라갈지 여기 있을지 아님 나도 따로 집을 나갈지 고민하고 있어. 삼등분된 고민의 선택지는 각자가 아주 비등비등하게 겨루고 있어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쿠라이 자신마저도 스스로가 셋 중 어떤 것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 것만 같았다. 난 그냥.. 할아버지 일이나 도우려고는 하는데. 할아버지가 난 내 맘대로 하라고 해서... 말한 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말하지 않은 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뜻의 이유였다. 이 집과 이 동네에서 누나가 생각난다면 떠나도 좋다고 했다. 할아버지도 무슨 마음인지 다 안다고 하면서. 알겠어요 감사해요.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몰라요. 내가 어떤 마음인지는... 

문득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사쿠라이는 갑자기 얼마 전의 생일이 떠올랐다. 주말엔 학교를 나가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니노미야와는 만나지 않는다. 그런데 초인종이 울려 밖으로 나가 보니 니노미야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냐는 말에 다 아는 수가 있다고 하면서, 니노미야는 잠깐 빨리 나와 보라고 했다. 허둥지둥 겉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가자 니노미야가 담벼락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엊그제 내린 눈처럼, 아주 오랜만에 봐서 오히려 어색했던 눈처럼 아주 하얗고 크지 않은 케이크 하나가 가만히 놓여 있었다. 니노미야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초에 불 붙여 줄게. 얼른 불어. 사쿠라이가 똑같이 쪼그려 앉아서 니노미야가 불을 붙이는 걸 바라보았다. 막 바람을 불려고 입에 바람을 넣자 니노미야가 다급하게 소원을 빌라고 했다. 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양손을 모은 채 하나뿐인 촛불 앞에 기도했다. 거창하지도 허무맹랑하지도 않은 단순한 소원이었다. 눈을 뜨자 촛농이 녹아내려 케이크에 떨어지려고 하고 있어서 서둘러 바람을 불어 불을 껐다. 니노미야가 작게 박수를 쳐주었다. 박수를 치면서 또 작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고마워. 그때만큼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니노미야는 기쁘게 웃었다. 그게 좋아서 사쿠라이도 덩달아 웃었다. 그러고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 그 담벼락 앞에서 케이크를 전부 나눠 먹었다.

이번에 돌아오는 니노미야의 생일에도 그런 걸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은 기쁨을 나눠 주고 싶다고. 물질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싶다고.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해버렸다.

“졸업하면, 같이 살자.”

라고.


그 말을 들은 니노미야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잠깐 갸웃대다가 그 말 진심이냐고 물었다. 사쿠라이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진심이라고 했다. 니가 싫으면 말고, 라는 말도 덧붙여주었다. 싫지 않아. 재빠르게 외쳤다. 혹시 제안한 사람이 그 말을 없던 일로 돌려버릴까 봐, 좋아, 라고도 했다. 그 뒤로 학교에서는 졸업하고 같이 살 곳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아무래도 이 동네에는 그녀석들도 살고 있으니 여기를 떠나는 건 당연한 듯했고 그렇다면 사회 초년생 둘이 살기에 괜찮은 곳이 어디일지 부모에게도 조부모에게도 가끔은 교사에게도 물었다. 교사들은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금은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각자 서로에게는 없었지만 보호자들은 떠난다는 손자와 아들에게 그정도는 선뜻 내 줄 수 있다고 했다. 

졸업식 날 모든 식순이 끝나고 자전거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니노미야가 먼저 사쿠라이의 단추를 뜯었다. 어차피 없는 사람 취급이었으니 이제 와서 두번째를 달라는 사람은 없을 게 뻔했다. 사쿠라이는 허전해진 가쿠란 앞부분을 내려다보고는 자전거에 올라타는 니노미야를 기다렸다가 단추를 뜯었다. 주먹을 쥐고 헤어지는 갈림길까지 갔다. 혹시 떨어트릴까 힘을 너무 쥐어서 주먹이 잘 펴지지도 않았다. 주먹채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먼저 멋대로 단추를 뜯어간 건 자기면서 니노미야는 교환을 기대했는데 낭만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잃어버리지나 마. 사쿠라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응. 둘은 다음날 최소한의 짐을 챙겨 마을을 떠났다. 자전거는 할아버지에게 양도했다.




그래도 마을과 도시는 취급이 제법 다르다. 사람들이 전부 우리에게 무심했다. 그것이 못내 기뻤다. 둘은 작은 방에서 함께 잠들었다. 웃풍이 들어 추우면 서로를 껴안았다. 그때 버팀목은 오로지 서로밖에 없었다. 도시로 나와서는 각자 일을 시작했다. 니노미야 쪽이 출근이 빠르고 퇴근이 일렀다. 일하러 나갈 때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사쿠라이를 흔들어 깨웠고 사쿠라이가 돌아올 때에는 저녁밥을 했다. 아, 오로지 이런 쳇바퀴 돌듯 단순한 삶이 얼마나 기꺼운지. 왜 사람은 사람을 잃어야만 했을까. 그러지 않고서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뿐. 네가 있다는 사실은 가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훨씬 반갑다. 

니노미야는 그 강둑에서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날 이후로 바다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마치 누나가 보고 싶다고 했던 다음 날처럼. 사쿠라이는 어쩐지 겹쳐지는 대상에 뒷목이 따끔따끔했다. 하루는 늘 끌어안고 자던 밤에 사쿠라이가 등을 돌리고 팔짱을 낀 채 취침을 시도했다. 그건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붙어 있는 피부의 온기가 따뜻해서. 작은 방에선 눈물을 숨길 곳도 없어서. 뒤늦게 이부자리에 파고든 니노미야는 의아해했다. 싸운 것도 아닌데 먼저 등을 돌린 사쿠라이를 보고는 말을 걸려고 했다가 이유가 있겠거니 넘겨짚고 자신도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언뜻 들리는 소리가 어쩐지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어쩔 수 없이 그 둥근 어깨를 붙잡고 모로 누운 사쿠라이를 반듯하게 눕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울고 있었다. 그 표정이 전에 없이 서러워 보여서 스스로도 울컥했다. 생각해보니 울고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울어?”

방울졌다가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있으면서도 니노미야는 그렇게 물었다. 마치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처럼.

“왜 울어...”

그러나 이 질문만큼은 진실이다. 우리끼리 잘만 살고 있었잖아. 우리에게 더이상 문제는 없잖아. 울게 하고 싶지 않은데 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곤란했다.

“울지 마. 좋아해...”

멈출 줄 모르는 그 액체를 따라 니노미야는 혀를 내밀었다. 짠맛이 났다. 사쿠라이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니노미야는 눈물을 핥았다. 울지 마. 좋아해. 같은 외로움을 알잖아. 그때 우리한텐 서로밖에 없었잖아. 좋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거 알잖아. 내보이기 싫은 곳까지 보여줘도 너는 나를 싫어하지 못했잖아. 그건 다 나를... 너도...

“응. 나도 좋아해.”

짠맛이 나는 입술에 입을 맞춘 사쿠라이가 그렇게 대답했다. 나도. 너도. 그때 우리한텐 서로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우리한텐 서로뿐이다. 사쿠라이의 팔에 머리를 올린 채 안긴 니노미야는 그 가슴팍에 자신의 귀가 닿는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뱃고동처럼 들려온다. 니노미야에게 내준 팔로 적당히 자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사쿠라이는 그대로 몸을 틀어 니노미야를 껴안았다. 안기면서 생각했다. 숨막혀. 그러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날이라고 하면 니노미야의 아파트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가리키는데, 또 그 마을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둘이 살게 되었던 때부터, 사쿠라이는 급료가 나오는 날마다 아무 여자 옷을 한벌씩 사들고 귀가하기 시작했다. 그 종이가방을 처음 봤을 때 집에 여자도 없는데 이런 건 왜 사오냐는 니노미야의 말에 사쿠라이는 되려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눌러 떴다. 정말로 젓가락질을 하는 동안 아무것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양치질을 할 때 일부러 옆에 서서는 누구 선물이라도 주려는 거냐며, 너, 설마 이 작은 집에 날 두고 바람이라도 피우느냐고, 장난식으로 옆구리를 찔러 농담을 던졌는데, 오히려 사쿠라이 쪽이 정색하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니노미야는 말없이 사쿠라이보다 먼저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그러고 수 분 지나 그 여자 옷의 의미를 금세 알게 되었다. 그건 말이지... 그날이 만든 멍자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사쿠라이는 멍이 들면 그게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눌러 보고 만지작대며 멍을 느끼려고 하는 쪽이었다. 자기 몸에 남겨진 상흔을 그렇게 확인하려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니노미야는 그걸 몰랐다. 실은 알 길도 없었다. 택도 떼지 않은 원피스를 입은 사쿠라이는 분명 남들이 봤다면 비웃을 게 뻔했지만 그걸 눈앞에서 마주친 니노미야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옆으로 밀어 두고 잠옷 차림의 니노미야 배 위에 올라탄 사쿠라이는 그렇게 얼빠진 얼굴은 처음 봤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웃더니 놀랐어? 하고 물었다. 니노미야는 힘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자신의 위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평소에는 입지도 못할 옷을 입고 움직이고 있는 사쿠라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간헐적인 신음소리에 니노미야는 왠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평소보다 더 빨리 사정했다. 사쿠라이는 그 원피스를 벗어두고 씻으러 가기 전에 또 농담조로, 너, 내가 여자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말도 없이 싸냐, 하고는, 니노미야가 대답을 하려고 어물대는 와중에 휙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니노미야는 어쩐지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 들어서 금세 잠에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사쿠라이가 사 오는 옷은 종류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여자들이 입는 옷들이었고 때로는 옷도 아닌 속옷을 사오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좋다고 앞을 세우고 어쩐지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 기분에 평소보다 기묘하게 흥분해서 옆집에 들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정신없이 섹스한 것도 맞지만. 그게 한 너댓 번쯤 반복되자 니노미야는 그 악취미 같은 취향을 누가 만들었는지 눈치채게 되었다. 그것은 그날 니노미야가 선사한 저주였다. 누나의 것은 아니지만 누나가 다니던 여고의 교복 치마를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사쿠라이에게 들이밀고 얻어맞고 울면서 섹스했던 그날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에게 어떤 상흔을 남기게 된 것이었다. 그런 일들이 스무번 서른번도 넘게 이어지자 이제는 가끔 그게 오래된 커플들이 권태기를 위해 상담을 하면 주어지는 일종의 이벤트 솔루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성벽 하나 희한하다. 응?”

“칭찬 고마워? 니가 만들어줬잖아.”

“그니까. 그러지 말걸.”

“솔직히 너도 좋지.”

“좋겠냐. 징그러.”

“웃기시네. 여긴 좋다고 세워 놓고.”

“좀 조용히 하면 안 돼?”

사쿠라이에게 우악스럽게 성기를 붙잡힌 니노미야는 숨을 들이켜면서 애원했다. 왜냐하면 며칠 전 사쿠라이보다 먼저 퇴근한 니노미야는 문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왼쪽 이웃인지 오른쪽 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마음속으로 남기며 니노미야는 그 포스트잇을 찢어서 버렸다. 그날이 또 사쿠라이의 월급날이었기에. 그런 것쯤, 사쿠라이가 원한다면 전부 해줄수 있었다. 해달라는게 뭐든지는 상관없었다. 가끔은 사람을 죽여달라고 해도 죽여줄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사쿠라이가 그런 걸 부탁할 리는 없다. 그날은 그때 니노미야가 건넸던 교복 치마와 아주 비슷한 치마를 입고 있어서, 니노미야는 괜히 윤활용 젤을 평소보다 한참 많이 쏟았다. 차가운지 미지근한지도 알 수 없는 액체와, 이미 한 번 낸 니노미야의 정액, 또 사쿠라이의 것도 어쩐지 한데 뒤섞여서는 몸과 몸이 맞부딪힐때마다 울컥울컥 흘러넘치면서 외설스러운 소리를 계속 만들었다. 들어봐, 너, 치마 입어서 그런가, 아.. 오늘, 그, 하아, 뭔가 여자애들 같은 소리 난다, 으으응, 힘 좀.. 힘 풀어..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니노미야가 그렇게 속삭이자 사쿠라이는 울듯이 여자애랑 해본적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으면서 니노미야는 저어, 에로비디오, 하며 웃었다. 


그런 섹스를 빼고는 참 별일 없이 잘만 살았다. 2년이 지나고 모아둔 돈으로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갔다. 이사간 집에는 테이블이 하나 옵션으로 있었다. 니노미야나 사쿠라이는 그 테이블에서 할일을 했다. 단순히 아르바이트나 일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걸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부엌쪽에 붙은 그 테이블을 거실에서 바라보면, 서로의 앞모습일 때도 있고 뒷모습일 때도 있었지만, 어쩐지 도망쳐나온 기분이 들었다가, 시선이 느껴져 들어올린 고개와 마주치면 그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사쿠라이가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뒷목을 얕게 덮은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잔머리가 어설프게 묻어 있는 그 뒷목은 더러움이라고는 모를 테다. 머리카락을 잡아 두고 있는 나머지 손가락 대신 자유로운 엄지 끄트머리로 그 목덜미를 또 한참 쓰다듬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어쩐지 그곳이 따끈해져서, 심장이 가슴에 있는 게 아니라 이 뒷목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이 길었어?”

“응, 아니.”

“넌 머리 많이 길었다. 거슬리지?”

“뭐 별로.”

“눈 찔리겠는데. 시간 될 때 가서 잘라. 나보다 퇴근도 먼저 하잖아.”

“알겠어.”

생필품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고, 빨래나 설거지 혹은 청소 따위의 집안일을 번갈아 하고, 머리카락이 길었으니 자르라는 말을 나누고, 터진 형광등을 갈고, 같은 이부자리에 눕고, 때로는 키스하는, 이 인생의 망중한이 너무나도 구름같아서, 하마터면 어떤 바다를 보고 싶어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살고 있었다.




*


사쿠라이가 드디어 유빙을 보러 가자고 했다. 보고 싶다고 한 쪽은 니노미야지만 어쩐지 제안한 쪽은 사쿠라이였다. 숙소도, 가는 길도, 코스도, 렌트카도 다 준비했으니까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니노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니노미야는 나, 실은 어떤 바다를 보고 싶어 했는지 까먹고 있었어, 라고 중얼거렸다.

눈길 운전 내내 불안불안히 목소리를 높이던 둘은 다행히 사고 없이 시간에 맞춰 숙소에 도착했다. 운전길이 너무 피곤했으므로 일단 씻고 자기로 했다. 유빙 따라 움직이는 배가 있다고... 유빙을 따라서는 아니겠지만. 어디에서 보는 것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고. 그게 기대돼서인지 니노미야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했다. 실은 늘 일어나던 시간에 적응해서 그때 눈이 떠진 것뿐이지만. 차를 끌고 가야 하냐고 물었는데 사쿠라이는 그럴 줄 알고 일부러 그곳과 가까운 데에 숙소를 잡았다고 했다. 천천히 눈이 한참이나 뒤덮인 거리를 걸어서 배에 올라타는 길까지 아주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는데 나누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어쩐지 그 10년치의 기대가 덮어씌워진 기분이 들었다. 날씨가 괜찮아서 유빙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둘은 배가 움직일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어째서일까? 구름은 없고 해가 맑았지만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배는 천천히 한참을 움직였다. 우리는 그때서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바다를 보았다. 유빙이 보이기 전의 바다는 아주 푸르러서 어쩐지 시커멓게도 보일 것만 같았다. 그것 말고는 고향 마을에서 항상 보았던 들판을 볼 때와 기분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수평선까지 뻗어 있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점점 푸른 바다에 흰 얼음들이 둥둥 떠올라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니노미야는 난간에 팔을 기댄 채로 한참이나 그것들을 쳐다봤다. 그런 니노미야가 갑자기 확 바다로 빠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사쿠라이는 한발짝 뒤에서 니노미야를 쳐다봤다. 한 절반쯤 왔을까, 이제는 유빙이 신기하지는 않을 때쯤, 아마도 배에 올라타서 거의 처음으로 니노미야가 입을 열었다.

“결혼할까?”

“뭐?”

유빙을 바라본 채로, 이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그대로, 니노미야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결혼식은 피차 번거로우니까 하지 말자. 우리 둘만의 기념이면 돼. 반지는 세 개쯤 봐뒀는데 니가 골라. 그리고 신혼여행은 날이 좀 따뜻해지면 가는 게 좋겠어. 오늘 말야... 추울 건 알았는데 그래도 너무 춥다.”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이니 반지니 신혼여행이니 하는 말을 줄줄이 뱉어내는 니노미야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져서, 한발짝 뒤에 떨어진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사쿠라이를 돌아보면서, 니노미야는 싫어? 하고 물었다. 그런데 싫으냐고 묻는 그 표정이 거절당할까 약간 두려워하는 듯했다. 사쿠라이는 십년이나 니노미야를 봐오면서 한번도 그런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싫다고 하면? 내가 결혼은 싫다고, 이대로 계속하자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얼굴이야? 아니, 애초에 결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야? 나한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너만 그런 고민 하면 다야? 결혼하면 우리... 뭐가 달라지는데? 사쿠라이는 도대체 니노미야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서, 싫지 않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함께하는 거잖아... 앞으로. 평생.”

평생이라는 말, 함께라는 말을, 니노미야는 아주 쉽게 입에 올렸다. 그런데 말은 행위보다 한참이나 무거웠다. 평생이라는 게 이루어질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주제에, 앞으로 평생 함께하자고, 그게 결혼 아니냐면서, 만난 지 십년만에 결혼하자고 했다. 니노미야가.

“지금이 아니어도 좋아. 나, 이 나이까지 살 줄 몰랐으니까, 니가 좋다고 하면 언제든지 좋아. 지금 싫어도 나중엔 좋아질 수 있잖아. 결혼하자고 하면, 결혼할게.”

“너 바보야?”

지금 싫은데 어떻게 나중에 좋아질 수가 있어. 서로가 서로의 믿음이 되고 지지대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주제에 가족이 된다는 사회적인 연결고리를, 실은 우리는 만들어낼 수 없는데도, 그러니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생활과 달라질 거 하나 없는데도,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에게 거절당할까 무서워서 이제는 유빙을 등지고 선 채로 사쿠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나, 바보니까. 니가 좋다고 해 줄 때까지는 몰라.”

덜덜 떨고 있는데, 그게 전혀 추위 때문이 아닌 걸 알게 됐을 때, 사쿠라이는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고 느껴져서,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 니노미야를 마주보고 섰다. 눈을 마주치고는 좋아, 결혼. 너랑 하면. 이라고 말했다. 한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서 니노미야를 끌어안았다. 또래에게서도, 피가 섞인 진짜 가족에게서도 떨어져나온 둘은, 결속 없이도 가족이 되었다. 종종 마주치는 유빙을 부수고 나아가는 유람선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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