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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봉투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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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4. 24.





몇주만에 만나 가진 저녁식사 자리는 평소답지 않은 조금 고급진 레스토랑이었다. 조명이 밝지 않아 테이블 위 알량한 촛불 하나로 표정을 가늠해야만 해서 니노미야는 애를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별 말이 없었다. 주변 테이블들은 모두 화목했다.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균형 좋게 뒤섞여 울려퍼졌다. 오랜만에 마주친 사쿠라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 생각했지만 일이 힘든 탓이라 넘겨짚었다. 아니면 입맛이라도 없든가. 

니노미야가 느리게 저작운동을 하는 동안 사쿠라이는 혼자서 와인 한 병을 천천히 다 비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평소와 같은 말들은 빈도가 줄었을 뿐이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오로지 아주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만이 얹힌 듯 존재했다.

그런데 딱 사쿠라이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자 직감인지 촉인지 아무튼 본능이라는 것에 뒷덜미가 바짝 선 니노미야는 손바닥을 펼쳐 눈 앞으로 뻗었다.

말하지 마.

무슨 말 할 줄 알고?

느낌이 안 좋아. 지금 하려고 했던 말, 하지 마.

눈치가 빨라도 별로 도움 안 될 때 있는 거 알지?

알아. 그래도 지금은 하지 마.

다 먹었어?

응.

같이 살지 않는 이상 날을 정하고 만나거나 날을 정하지 못하면 일정을 짜맞춰 얼굴을 봐야 했다. 언제나 바쁜 쪽은 사쿠라이였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다섯 손가락을 다 접고도 남는 햇수 동안 지켜봐오면서 늘 모터가 달린 듯 움직이는 건 습성임을 알았다. 쉬는 날엔 꼬박꼬박 먼저 만나자고 했다. 그러니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의 쉬는 날이 본인의 휴일이 아니어도 억지로 일정을 벌려내 일 없는 날로 만들었다. 그걸로 생색 같은 걸 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따지자면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상대였어도 분명 그렇게 했으리라 여겼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래도 가끔은 니노미야가 먼저 운을 떼는 날이 있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는 꽤 강력하다. 그는 철옹성처럼 느껴져도 어쩐지 늘 어리광에는 물렀다. 그건 아마도 사쿠라이가 맏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니노미야는 스스로가 귀염 떠는 짓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점을 높게 샀다. 전화통을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어디든 괜찮아요. 그날 다 비어요. 얼굴 보고 싶은 거니까 아무데나 다 따라갈게요. 그 말에 습관처럼 사쿠라이는 정말 아무거나 괜찮은 거냐고 되물었지만 그럼에도 니노미야가 싫어하거나 힘들어하는 것들은 쏙쏙 빼놓은 채로 준비해주고는 했다. 그것들은 몇 년 전 한참 하루가 멀다 하고 부대끼며 싸우고 서로 울고 맨정신으로 화해하고 술로 풀어내던 때에 얻어낸 보람들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기 때문에 몇주쯤 보지 못해도 전화 한통으로 괜찮은 날들을 살아간 것이었다. 

좀 걸을까?

차 어디다 댔어?

술 마셨잖아.

택시 타게?

여기선 우리 집이 너네 집보다 가까워. 모르니?

걸어서 가기는 좀 그렇잖아. 지하철? 버스?

막차 시간 무서워하던 때는 지났지.

진짜 그냥 걸어서 갈 거야?

오랜만이라 그런지, 술이 돌아서인지, 날이 추워서인지, 마주본 사쿠라이의 얼굴은 어딘가 희었다. 그리고 자꾸만 어긋나는 대답뿐이었다. 걸어서 간다면 한시간은 걸리지 않지만 그래도 제법 걸리는 거리인데 코끝이 붉어질 정도인 날씨에 사쿠라이는 정말로 그곳에 걸어서 갈 셈인 듯했다. 그 다짐을 알아챈 니노미야는 잠시 멈춰섰다가 발걸음을 재촉해 사쿠라이의 옆에 서서 걸었다.

오늘 좀 이상하다.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까 전부터 그 직감이라는 것이 니노미야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함부로 무언가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 잘못됨에는 니노미야가 전혀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느껴졌다.

사쿠라이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입에 지퍼라도 채운 듯 다물려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채근해 무슨 말이라도 하게 만들었을 테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걸음을 빨리 하는 수밖에. 도무지 신호도 한 번 걸리지 않고 그만큼을 걸었다.

좀 천천히 가!

자고 가게?

그래!

내가 옛날에 너한테 제일 많이 했던 욕이 뭔지 기억나?

이 개새끼.

지금 그렇게 부르고 싶다. 집에 콘돔 없어.

사올게.

그럴래?

나더러 개새끼라는 당신은 씨발새끼. 그치만 사랑합니다. 어쩐지 오늘이 아니면 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바짓가랑이를 붙잡듯 니노미야는 불이 켜진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나는 지하철을 놓쳐도 뛰지를 않아요. 아시나요. 헐레벌떡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대로 계산한 뒤 다시 또 달려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층 아파트. 님은 어째서 이렇게도 높은 곳에 사시는지. 비밀번호가 틀릴까 무서워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사쿠라이는 아까 전과 같은 복장이었으나 넥타이가 없었고 단추는 몇 개 풀어져 있었으며 양말도 벗은 채였지만 벨트는 왜인지 그대로였고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칫솔 안 사 왔는데.

새거 있어.

씻을 거야?

응. 금방 나와. 좀 기다려.

네.

사쿠라이가 가리킨 곳에서 새 칫솔을 꺼내들고 거실에 멍청하게 앉은 니노미야는 바지 주머니에서 허벅지를 자꾸만 찔러대는 5개입 콘돔 박스를 꺼내 아무데나 던져두었다. 오늘 헤어지자고 할 거였으면 집에 들여보내주지 않았겠지. 아까부터 선명하게 밝아오는 그놈의 촉은 이별을 말하고 있었다. 분명 헤어지자고, 그만 만나자고, 이젠 보지 말자고 하려는 얼굴이었다. 알 수 있다. 이전에도 그 말은 몇 번이고 튀어나온 적 있었으니. 그러나 그때는 전부 홧김에. 취해서. 어수선하게. 흘러나온 한마디를 수습하려고 사쿠라이도 애를 쓰던 시절. 그때마다 무릎을 꿇거나 되려 화내거나 먼저 집으로 돌아가던 니노미야가 있었으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 헤어짐은 금세 없는 게 되었었다.

오늘만큼 정갈하게 다가온 헤어지자는 없었다. 아니, 그 말은 사쿠라이의 입 밖으로 나온 적 없지만, 이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니노미야가 밥을 먹다가 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그 말은 이것. 사쿠라이의 속에서 소화가 다 된 채 뱉어지기만 하면 그만인 말. 그러나 니노미야는 하나도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 이유도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아까 전 고요하게 느껴지던 찬기는 간데없고 따뜻한 물에 씻은 사쿠라이가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못 보던 샤워가운. 니노미야는 희미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금방 나올게.

사왔어?

좋아하는 거 까먹었어.

아무거나 사왔지?

응.

괜찮아. 상관없어.

양치질을 세 번. 십 분 넘게 이를 닦았다. 혀를 닦다가 토할 뻔했다. 생리적 눈물을 닦아내고 번개에 콩 볶듯 샤워했다. 문을 열어보니 가지런히 옷이 놓여 있었지만 입지 않았다. 어쩐지 막 처음 만났을 즈음처럼 초조했다. 수건을 허리에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사쿠라이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안 입었어?

어차피 벗을... 아 미안해.

됐어. 그런 거로 화내냐?

거실 조명을 미등으로 바꾼 사쿠라이가 먼저 방으로 홱하니 들어갔다. 바닥에 던져뒀던 콘돔을 다시 주워들고 니노미야는 그 뒤를 따라갔다. 침대 옆에 서서 니노미야를 바라보는 사쿠라이가 오늘따라 아득하게 느껴진다. 한발짝 다가서자 사쿠라이는 그제야 살짝 웃어주었다. 입을 맞췄다. 팔꿈치를 붙잡고 키스했다. 그러고 나서 니노미야는 작은 소리로 괜찮아? 하고 물었으나 사쿠라이가 니노미야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수건을 붙잡아 바닥으로 끌어내리며 언제부터 그런 걸 물어봤어?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아까보다도 더 작은 소리로 니노미야는 말했다. 그런 니노미야를 벽으로 밀어낸 뒤 그 앞에 꿇어앉은 사쿠라이는 말없이 성기를 입에 물었다. 새삼스럽게 기분이 이상했다. 해달라고 조르지 않는 이상 먼저 빨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예 없던 건 아니었으니 놀랄 일이 아니라면 아니기도 하지만 일련의 흐름으로 인해 민감해진 게 분명했다. 

그만,

급해?

응.

왜?

오랜만이라.

니노미야가 이끄는대로 움직여 누운 사쿠라이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얼마만에 만나는지 세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안 했어? 어.. 아마도. 전화하지. 언제부터 그런 걸 해줬다고. 더이상 대답은 없었다. 대신 속도를 올렸다. 아까 전의 감각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모든 걸 재촉하게 됐다. 왜냐하면 마지막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서투르게 드러난 기분 탓에 올라간 템포는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었고 사쿠라이는 그게 전부 버겁게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게 된 니노미야가 자기도 모르게 애쓰는 모습이, 어떻게 해야 방금 전 유예된 그 말 한마디를 취소시킬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 안타까웠다. 니노미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한껏 젖은 채로 침대에 몸의 선단들을 겹쳐 누워 있자 잠이 쏟아졌다. 이대로 하루가 지나간다면. 오늘의 일은 없던 일이 된다면.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니노미야는 멋대로 눈을 감았다.

있지.

방금 전까지 한숨처럼 느껴지던 신음을 벅차게 뱉어내던 사쿠라이는 금세 정돈된 호흡으로 말을 꺼냈다. 니노미야는 그 뒤에 올 내용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아까 전 레스토랑에서처럼 민첩하지 못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그럴 줄 알았어.

헤어지기 전에 여행이나 갈래? 다음주 오늘이랑 같은 요일 정오에 집 앞으로 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말할 거였지. 어떻게든 그럴 거였지.

1박 2일이랑 당일치기 중에 어떤 게 좋아?

하루 자는 거.

그래. 옷 챙겨 와도 되고 그냥 와도 돼. 잘 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도…

다시 대답은 없었다. 사쿠라이는 졸음이 훌쩍 달아난 니노미야를 곁에 두고 먼저 잠을 청했다. 다 알고 있던 말이었고 다 눈치 챘던 뜻이었지만 직접 듣게 되는 건 실로 다른 일이었다. 한번 도망간 졸음은 돌아오지를 않아서 니노미야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그래도 니노미야의 특장점이라고 하면 어쩐지 말을 잘 듣는다는 점. 싫다고 해도 고분고분하게 굴어준다는 점. 싫은 말은 해도 싫은 짓은 하지 못하는 점. 울며 겨자먹기로 하루치 짐을 백팩에 챙겨 사쿠라이네 집 앞에 도착한 니노미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집주인의 턱짓에 얌전히 조수석으로 향했다. 어디 가냐는 질문에 사쿠라이는 답이 없었다. 우리 아직 헤어진 거 아니다? 남처럼 그렇게 굴 거야? 니노미야가 몸을 거의 옆으로 돌린 채 쏘아붙이는지 애원하는지 구분할 수 없는 말투로 따지자 사쿠라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어디든 괜찮잖아. 그 말엔 각주를 붙일 수가 없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은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풀어져 한시간쯤 달리는데도 금세 잠들었다. 도착했어. 허리를 숙여 벨트를 풀어주며 잠든 니노미야의 팔뚝을 문질러 깨우는 사쿠라이의 목소리는 아까 전보다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눈앞은 항구였다. 아직 떠나는 배가 들어오지 않았는지 선착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앞으로 돌려 둔 가방을 꽉 쥔 니노미야가 운전석을 돌아보았으나 사쿠라이는 어느새 문을 열고 나가 트렁크에서 보스턴백을 꺼냈다. 문을 닫더니 창문을 통해 니노미야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마치 안 나오냐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니노미야는 서둘러 조수석을 빠져나왔다.

우리 어디 가?

선착장에 써 있어.

표를 바꾸러 가는 사쿠라이를 따라가는 니노미야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비행기를 타면 탔지 배 같은 걸 굳이 타러 가자고 한 적은 없었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든다. 선착장 근처에 아무렇게나 멈춰 선 니노미야를 두고 표를 두 장 바꿔 온 사쿠라이는 이쪽으로 오지도 않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어느새 도착한 배에 올라타려고 했다.

멍청히 서 있던 니노미야가 한쪽 어깨에 가방끈을 걸치고 선착장으로 달려오자 사쿠라이가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내가 싫어하는거 알면서!

그래?

멀미하는 것도 다 알면서!

그랬나? 싫으면 타지 마.

거의 악쓰는 듯이, 그러나 엄청나게 폭탄 발언을 할 수도 없고 할 만한 내용도 없는 탓에 마치 반찬 투정이나 하는 초등학생처럼 소리친 니노미야에게 사쿠라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랬나? 라니. 분명히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니노미야가 어떤 일로 사쿠라이의 눈밖에 났는지 무슨 말을 했길래 첫인상이 그렇게 최악이었는지 억양마저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뱃멀미 하나를 기억 못할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 그러나 니노미야의 좋고 싫음과 괜찮고 나쁨은 지금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배 끄트머리에 서서 니노미야를 바라보는 사쿠라이는 정말로 니노미야가 타든 말든 상관없이 떠나버릴 것 같아서 니노미야는 어쩔 수 없이 검표원에게 일행이라는 말을 뱉으며 배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객선이어도 흔들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얼마 걸려? 사쿠라이는 시계를 한 번 표를 한 번 확인하더니 두시간 좀 안 걸려, 라고 대답했다. 그냥 아무 의자에나 앉아서 잠이라도 자려고 했는데 십 분쯤 앉아 있으려니 어지러워서 어쩌지를 못했다. 그런 니노미야에게 사쿠라이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아무리 그만 만나자고, 이제 헤어지자고, 우리는 더이상 애인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어도, 거진 십년이 되어가는 시간 동안 말을 나누고 눈을 마주치고 손을 부딪혔던 건 오로지 그 연인 두글자에 얽매이기만 하는 역사였느냐고, 사랑은 둘이 했는데 어째서 이별은 단 한 명의 선언으로 정해질 수 있는 거냐고, 별안간 이렇게 확 발을 빼버리듯 모르는 사람인 양, 정이라도 떼버리려는 것처럼, 아니 이미 싫어진 것처럼 모른 체할 거냐고, 이건 정말이지 인간 대 인간으로라도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며, 니노미야는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지르고 싶었으나 사람도 제법 많았고 흔들려서 그렇게 소리지르다간 토할 것 같아서 사쿠라이의 어깨에 기댄 채로 말했다. 니노미야가 가슴팍을 들썩이며 한참이나 말하는 동안 사쿠라이는 대꾸 한마디 없었다. 그점이 가장 서운했다. 차라리 예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를 들볶으며 아주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을 핑계삼아 싸우던 때가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는 대답이 없기는커녕 서로가 서로의 말을 매번 끊어가며 화를 냈으니까, 반응이 없는 걸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고.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객실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니노미야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얼마 전에 본 안내문구를 떠올렸다. 


객실 내에 구토봉투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배 바깥으로 고개를 숙이려 했으나 주의사항이 크게 적혀 있었다. 위험. 바깥으로 고개 내밀지 말 것. 그냥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로 배에 가장 가깝게 붙어 있으려고 앉아 있었다. 들고 온 가방을 뒤지면 뭐라도 써먹을만한 게 있을 것 같긴 했지만 다시 일어나서 들어가 가방을 뒤질 힘이 차마 없었다. 얼른 도착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니노미야는 바닷바람에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가는 승객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사쿠라이일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나 익숙한 걸음걸이는 바닥에 앉은 니노미야에게로 다가왔다.

토할 것 같아?

응, 이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사쿠라이는 잠깐 기다려, 라고 하더니 다시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객실 안에는 구토봉투 같은 건 없다고. 사쿠라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조금 뒤 사쿠라이는 검은 비닐봉투와 이온음료 캔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갑판으로 나왔다. 눈을 희미하게 뜬 채로 사쿠라이를 올려다본 니노미야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머리를 벽에 기대고 있던 니노미야는 사쿠라이가 대주는 봉투에 턱부터 가져다댔다. 먹은 게 없어서 나오는 것도 별로 없었다. 사쿠라이의 손을 밀어내자 봉투 끝을 간단하게 묶은 뒤 들고 있던 캔을 따서 니노미야에게 건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멀미약이라도 사들고 오라고 하든지. 미운 마음에 입을 삐죽였다. 캔을 기울이는데 배가 흔들리는 탓에 앞니를 부딪혔다. 마시지도 못하고 캔을 든 채 가만히 있자 사쿠라이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번엔 페트병으로 된 이온음료를 사들고 나와서 뚜껑을 돌리고 니노미야에게 건넸다. 캔은 자기가 가져가 마셨다. 니노미야는 목을 축이고 속을 달래며 한편으로는 헛웃음이 났다. 왜. 속이 타냐? 따라오라고 했으면서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아님 이럴 거 다 알았으면서 여행 계획을 이렇게 짠 게 후회돼서? 어느 쪽도 아니지? 

바람이 심해지자 페트병을 건네받은 사쿠라이는 니노미야를 일으켜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전처럼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더니 또 토할 것 같으면 말하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니노미야는 역시나 대답할 기운이 없어서 고개를 몇번 끄덕이고 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는 멈추었다. 승객들이 내릴 채비를 하자 그제야 사쿠라이는 니노미야를 흔들어 깨웠다. 이거 더 마셔. 자기 보스턴백을 들고 니노미야의 백팩도 어깨에 걸친 사쿠라이는 페트병을 내밀더니 나가자고 했다. 니노미야는 가만히 따라 나갔다. 

그저 니노미야가 뱃멀미를 했을 뿐 날씨 자체는 아주 좋았다. 겨울 치고 햇빛이 따뜻했고 섬에 내리자 바람도 잦아든 것 같았다. 별로 큰 섬 아니라 차 안 갖고 왔어. 밥이나 먹고 바다 구경하려고. 한걸음 앞선 채 말하는 사쿠라이는 보지 못하겠지만 니노미야는 고개만 끄덕였다. 땅에 내려 걷기 시작하니 상태가 괜찮아져서 가방을 다시 받아가고 싶었는데 사쿠라이는 건네줄 기미가 없었다. 숙소에 짐부터 놓고 오자. 가까워. 응. 별로 무거운 가방은 아니었으므로 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짐을 맡긴다는 게 껄끄러웠다. 숙소에 가방을 가지런히 내려둔 사쿠라이는 그제야 뒤를 돌아 니노미야의 얼굴을 마주봤다.

겨울이라 자연스레 차가운 손을 니노미야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열은 없네. 괜찮지? 니노미야는 그 냉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자. 스르르 내려간 손을 자기도 모르게 붙잡았는데 사쿠라이는 그걸 한 번 쳐다보더니 별말 않고 풀어내지도 않고 앞서 갔다. 혹시 잡은 손이 풀릴까 싶어서 니노미야는 평소보다 힘을 더 주었다.

사쿠라이가 데려간 곳은 조개구이집이었다. 니노미야는 또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이전까지의 사쿠라이 같지가 않았다. 사쿠라이가 조개 따위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니노미야도 종종 선물하거나 식사로 대접한 적 있었지만 반대로 니노미야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메뉴를 따로 하거나 굳이 권한 적도 없던 게 사쿠라이였다. 그러니까 싫어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 거, 하지 못하는 거, 힘들어하는 것들은 애초에 선택지에서 제외한 것처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던 사쿠라이는 다른 사람인 듯이, 마치 니노미야가 할 수 없고 하기 어려운 것만 골라서 준비해온 게 정말 모르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조개구이집이라고 그것만 파는 건 아니었지만 니노미야는 다른 메뉴를 주문해 받았으면서도 입맛이 없어서 젓가락으로 식사를 해체하기만 했다. 종종 푹 숙였던 고개를 들면 사쿠라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늘 웃던대로 웃으며 많이 먹으라고 앞으로 밀어줬다. 그래도 관계의 끝을 선언한 날부터 강렬하게 느끼고 있던 배신감은 이제 마치 한몸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검은 비닐봉투에 토해낼 수도 없었고 바다에 뜯어내 버릴 수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해가 져가고 있었다. 바다 보러 가자. 사쿠라이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모래사장에 그냥 주저앉은 사쿠라이는 한걸음 뒤에 서 있는 니노미야를 돌아보았다. 안 앉을 거야? 그제야 옆에 털썩 앉은 니노미야는 삼켜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옆자리에 앉은 사쿠라이를 쳐다봤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듯한 노을빛을 받은 얼굴이 보였다. 바람을 맞아서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 동그란 이마가 다 드러났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는 시선은 바다 너머를 향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래 봐 온 얼굴, 이런 저런 모습을 전부 봐 온 사람, 알 수 있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바라보는 사쿠라이의 얼굴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고, 보여주는 모습도 그 몇년간 니노미야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듯해서 계속 낯설었고,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정말 하나도 종잡을 수가 없고 알지도 못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검푸른 바다가 태양을 지워내는 동안 사쿠라이는 니노미야 쪽을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해가 지고 나자 파도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저 멀리에서는 폭죽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족끼리 놀러왔는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둘과는 상관없고 아주 멀리 있어서 오히려 분리된 것만 같았다. 니노미야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사쿠라이를 향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싫어?

아니. 싫어하지 않아.

그럼 왜?

지쳤어. 질렸어.

나한테?

그것도 아니.

그럼 뭔데?

그냥 모든 것에.

그렇다고 날 버려?

내가 언제 널 버렸어.

지금 이러는 건 뭔데? 결혼이라도 하래?

너 우리 부모님 만난 적도 있으면서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싫은 것도 나한테 질린 것도 아닌데 왜 헤어져? 쉬워 그게? 혼자 정리하고 말해버리면 끝이야? 나는... 나는?

나에게는 한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지쳤으니 달라지라는 말, 지겨우니 변해 보라는 말 같은 거 한 적 없었잖아. 내가 싫어진 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잖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무서웠어. 사쿠라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처럼 다시 입이 다물렸다.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의 양 팔을 붙잡고 아무 말이라도 해 보라며 흔들었지만 사쿠라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정도 만났으면 그만 만나도 되는 게 아닐까 해서. 평생 연애할 건 아니잖아. 이쯤 되면 너도 질렸을 것 같아서. 너, 신작이 나오면 예약해서 플레이하잖아. 그런 애가 십년쯤 한 사람이랑만 만난다는 건 어딘가 모순처럼 느껴져. 자는 것쯤이야 사랑 안 해도 할 수 있지만. 이해해? 이런 말 나도 정말 너에겐 하고 싶지 않았어. 네가 변한 것도 네가 변해야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이상해졌어. 일이 바빠서 그런 것도 아니야. 미안해. 네 잘못은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그 표정 뒤에는 이런 말이 이어졌다. 사쿠라이는 니노미야에게서 벗어나 모래 위에 누웠다. 코트를 깔개 삼아. 

왜 여기로 왔어? 다 알잖아. 나 바다도 싫어하고 멀미하고 배도 싫어하고 비린내도 싫어하는 거...

알아서 그랬지. 안 탈 줄 알고.

같이 가자며. 헤어지기 전에 가는 거라고 했으면서.

응. 싫어서 안 탈 줄 알았어.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같이 타서 따라올 줄 몰랐어.

같이 가자고 한 게 누군데.

그러게.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나.

유치한 말들을 반복하며 니노미야는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났다. 우는 걸 들키기 싫어서 무릎을 세워 앉은 채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무릎이 다 젖을 정도로 울게 되자 엉엉 소리가 났다. 사쿠라이가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니가 안 타면 나 혼자 가는 여행이잖아. 그럼 헤어지기 전에 가는 여행이 아니고.. 그래서 그랬어. 

홧김에 정했지? 다 알아.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러게. 몰라... 너 정말 왜 따라 탔어? 안 탈 줄 알았어. 미안해. 

안 따라가면 안 돌아올 것 같았으니까. 정리가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말해. 날 그렇게 봤으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몰라? 내가 미저리처럼 다리라도 부러트려서 못 가게 할 줄 알고? 그래, 신작은 예약해서 사지만. 그치만 그렇다고 내가 이미 사둔 게임을 버린 적 있어? 예전에 했던 게임 다시 안 연 적 있어? 

우는 니노미야를 눈앞에 둔 사쿠라이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여전히 비스듬히 누운 채였지만 손에 모래가 묻은 채 눈물을 닦아줄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옷깃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은 니노미야는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주변에선 여전히 폭죽이 한두개씩 터지고 있었다.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으면 되잖아. 매번 내가 좋아할지 고민 안 해도 돼. 내가 괜찮다고 하는 건 정말 괜찮다는 거야.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안 쓰는 게 내가 신경써 주는 거야. 그걸 아직도 모르냐? 날 이렇게 모르는데 어떻게 헤어지자고 해. 십년은 멀었어. 

십년 뒤면 너 몇살이니?

나보다 그쪽이 나이 많으니까 상관없어.

춥다. 들어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에 묻은 모래를 대충 털어낸 사쿠라이는 니노미야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해변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건 당연하잖아. 너보다 내가 나이 많은 거. 어른 대접도 안 해 주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르신 대접을 원하면 해주고. 분명 예전엔 나한테 반말 안 썼는데 언제부턴가 자꾸 이렇게 말 까고. 그러니까 존댓말 원하면 해드리고요. 시끄러. 

숙소에 돌아간 뒤 코트를 이불처럼 몇 번 털어낸 사쿠라이는 이미 씻으러 들어간 니노미야를 기다렸다. 침대 위에 먼저 올라가 있던 니노미야는 불을 끄고 자리에 들어온 사쿠라이를 껴안으며 말했다. 추우니까 안아줘.

다음날 아침에 사쿠라이는 멀미약을 사들고 와서 올려두었다. 니노미야는 냉큼 알약을 삼키고 가방을 뒤져서 안 쓰는 비닐봉투를 꺼내 겉옷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케이블카 갔다가 배 타러 가자. 선착장에 짐을 맡겨 두고 케이블카를 향해 걸었다. 그냥 나 따라오지 말라고 현수막을 붙이지? 싫어하는 것만 쏙쏙 골라서 준비를 하셨네요? 몰라. 

점심을 먹고 배를 타면 어떨지 몰라서 일단 육지로 간 다음 식당을 알아보자고 했다. 니노미야는 선착장에서 다시 겉옷 주머니를 확인했다. 이 배는 올 때 탔던 배는 아니지만 안내문은 동일했다. 

구토봉투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니노미야는 말했다. 나 토할 것 같다 하면 등 두드려 줘야 돼. 주머니에 넣었던 비닐봉투를 옆에 앉은 사쿠라이의 손에 밀어넣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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