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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나가서 왼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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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8. 11.




구토봉투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 앞내용...




어라. 지금 누구랑 키스하고 있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무렵 오른손은 이미 허리께에 와 있는 상대의 맨 허벅지를 만지고 있었는데

어쩐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아주 질색하는 얼굴의 그가...

입맛 버렸다는 듯 눈썹을 거의 일자로 만들더니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냅다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골목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 인기척에 정신이 팔려 움직임이 둔해지자 상대가 재촉해왔지만 더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적당히 마무리한 뒤 꼴에 심통난 얼굴을 한 상대를 달래 들여보내고 그가 버리고 간 장초를 주워 피웠다. 목이 시큰할 정도의 멘솔.

자리로 돌아가는데 다시 이리로 나오는 그를 보고 멈칫했다가 밖으로 다시 나가는 걸 보고 몸을 한쪽으로 돌려 비켜 주면서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 뒤에는 조악하지만 나름대로 모양새를 갖추려고 노력한 손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화장실은 나가서 왼쪽에 있습니다.




분명 나가는 좁은 길에 마주쳤는데도 그는 니노미야를 모른 척했다. 눈길도 주지 않고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러려니 비슷하게 대응했을 테지만 괜히 되려 신경이 쓰여 곁눈질하다 이름 모를 앞자리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벌써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로 아, 인문대 학회장?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괜히 뒷얘기하다 걸리는 기분 같은 건 들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얘기를 끝내려고 했으나 그 인문대 학회장이라는 두 단어가 물꼬가 되었는지 주변에서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름도 알게 됐다. 사쿠라이 쇼라고 했다. 작년엔 휴학했고 올홰 복학해서 학회장이라고, 아, 그렇다면 니노미야는 왜 2학년이나 된 지금에서 모르는 얼굴이 나타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학회장이라고 해서 그렇게 학을 떼고 질색할 일인가. 오히려 그정도로 부대낄 사람이 많으면, 취해서 골목길에서 부비고 있는 남녀 한쌍을 보는 데에는 도가 텄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화장실에 갔던 그가 돌아왔는지 주변이 일순 조용해졌다. 자기가 들어오자 테이블의 웅성거림이 잦아든 걸 눈치챘는지 이쪽을 보며 입모양으로만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그 사람도 대충 눈치를 챘는지 금세 돌아서 더 안쪽에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니노미야는 자신이 고개를 돌리고 나자 사쿠라이가 자신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인문대여도 과는 다를 수 있잖아, 우리 학교 인문대에 과가 몇 개냐, 하면서 검지를 세 번이나 접었었는데, 불행인지 행운인지 그 사람과 니노미야는 같은 사회학과였다. 동아리는 천체관측부라고 쓰고 노가리부라고 읽는 시간 때우기용 하꼬동아리밖에 들지 않은 니노미야로서는 그 사람을 달리 알 길도 없었던 건 확실했다. 뭐어, 휴학을 한 번 했음 이제 더 휴학할 일도 없을 듯했고, 학년이 한 계단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면 저 사람이 졸업할 때까지 계속 부딪히려니 싶어서, 니노미야로서도 딱히 밉보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그랬다. 먼저 변명하자면 니노미야는 문란하다거나 난잡하다거나 하는 그런 소문들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양다리가 몇개고 여자가 끊이지 않고 그런 일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누군지도 모를 상대와 골목길에서 키스한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한한 일이었는데, 어쩐지 하늘이 돕지 않는다는 듯, 사쿠라이는 매번 그런 니노미야만을 마주치게 됐다.

빈 과방에서 막 차이고 눈물바람으로 돌아온 안면만 익힌 4학년 누나에게 밀쳐져 소파에 머리가 부딪혔을 때. 놓고 간 프린트를 가지러 문을 연 사쿠라이와 눈이 마주쳤다.

낮술 하다가 화장실에 토하러 온 동기가 물 빼러 온 니노미야의 바지춤을 쥐고 있을 때 일 보러 온 사쿠라이를 맞닥뜨렸다.

1학년 때 오티에서 만나 한 달 사귀었던 전 여자친구가 치마 입은 주제에 니노미야 앞에 무릎을 꿇듯이 하면서 다시 만나 달라고 하는 장면을 사쿠라이에게 보여주고 말았고.

빈 강의실에서 저번에 니노미야의 허벅지를 몰래 건드리던 다른 과 누나에게 키스당했을 때. 교수님 부탁으로 다음 강의 준비를 도우러 홀로 들어온 사쿠라이가 강의실 불을 켰다.

마지막으로는 솔직히 말하면 니노미야도 전날의 숙취가 빠지지 않았고 조금 동한 것도 있지만 교내 음란행위에 절대 동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찌 됐든 일전에 무릎을 꿇으려고 했던 전 여자친구가 자기 동방에 니노미야를 끌고 가 니노미야의 손을 자기 가슴에 올려뒀을 때, 하필이면 전 여자친구와 같은 동아리인 사쿠라이가 친구를 찾으러 문을 벌컥 열었다.

그때마다 사쿠라이는 꼭 그런 걸 죄다 처음 본다는 듯 그 골목길 입구에서처럼 표정을 굳히고, 그 표정은 또 니노미야에게만 보여준 다음, 상대방에게는 언제나와 같은 사람 좋은 웃음을 머쓱하게 보여주며 실례했다는 듯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 표정을 몇 번이고 봤는데 당장 눈앞의 사람에게 흥미가 생길 리 없었다.

전 여자친구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사귀던 한 달 동안 절대 보여준 적 없었던 진실된 화난 얼굴을 하고는 다시는 절대 이런 일로 나 부르지 마, 라는 선전포고를 던진 뒤 니노미야는 건물을 빠져나와 구석 흡연구역으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장면들을 마주친 게 사쿠라이가 아니고 매번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다못해 사쿠라이가 아닌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들키기라도 했으면 이정도는 아니지 않았을까. 쪼그려 앉은 채로 꽁초를 세 개나 만들고 돗대에 불을 붙일 무렵 흡연구역에 인기척이 생겼다.

뿌연 연기 너머에는 또 그 사람이었다.

또 사쿠라이 쇼다.

제발이지 이제는 좀 피하기라도 하고 싶은 그 사람이 다시 니노미야의 눈앞에 나타난 거다. 그 마음이 얼굴로 드러났는지 쪼그려 앉은 니노미야의 얼굴을 흘겨본 사쿠라이는 헛웃음을 던지고는 니노미야로부터 꽤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건 도대체 어떤 깡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니코틴이 과하게 들어가서 머리가 좀 말랑말랑해진 게 아닌가 싶다. 담배를 태우다 말고 걸려온 전화를 받는 사쿠라이를 보면서 돗대를 다 피운 니노미야는 빈 답뱃갑을 손 안에서 찌그러트리고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슬라이드를 밀어 닫고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집어넣는 것까지 본 뒤 니노미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서 무릎이 휘청였지만 아닌 척하고 사쿠라이 앞에 가 섰다.

첫인상도 최악이고, 그 다음도 최악, 다다음도 최악, 흡연구역을 지멋대로 너구리굴처럼 만드는 지금조차도 아주 별로인 인상일 게 뻔했다. 그치만 답지 않게 니노미야는 변명이 하고 싶었다.

“저 선배.”

“응?”

“지금까지 보신 거요. 뭐.. 그런 것들. 그거요... 다 제가 하자고 한 거 아니니까. 믿지 못하시겠지만.. 진짜 저는 다 당한 거니까.”

“그래서?”

그래서? 라고 되묻는 사쿠라이의 표정을 그때서야 제대로 마주했는데 니노미야는 하마터면 놀라서 뒷걸음질칠 뻔했다. 매번 봐왔던 그 사람 좋은 웃음은 간데 없고, 그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의 질색하는 얼굴도 없고, 어쩐지 베일 듯 싶은 아주 차가운 얼굴만이 있었다. 왠지 쫄아서는, 니노미야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고요. 저 그런 거 막 하는.. 그런 애 아니라고.”

“그래?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지?”

“그러게요. 근데 보셨잖아요. 그러니까. 혹시 누구한테 말하실까 하고.”

“그럴 일 없어. 걱정하지 마. 그런데 내가 본 게 있는데 니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어?”

“에?”

니노미야의 얼굴에 연기를 훅 뱉고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사쿠라이는 어쩐지 비웃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믿겠냐구. 니가 문란한지 어떤지, 니 입으로 말하면. 내가 믿을 수 있겠어?”

그 생전 처음 보는 표정에 굳은 채로 서 있는 니노미야를 두고, 가방을 고쳐 멘 사쿠라이는 그렇게 말했으니 믿어는 줄게, 하면서, 솔직히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위안 담긴 그 말을 하면서,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오기가 생기는 게 아닌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잘보이고 싶단 생각 따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니노미야가, 자신의 추태를 마주한 처음 보는 선배에게 잘보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아주 별로인 첫인상들을 없앨 만큼, 실은 성격 좋고 싹싹하고 데리고 다닐 맛 나는 좋은 동생이고 후배라고 생각하고 싶게 만들었다.




행운의 여신이 니노미야를 돕는지 훼방을 놓는지 학년 상관없이 듣는 교양 수업 조별과제를 사쿠라이와 같이 하게 됐다. 물론 강의실에서 사쿠라이는 껄끄럽다는 티조차 내지 않았고 나서서 역할 분배까지 해 줬으니 니노미야로서는 오히려 점수를 딸 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전공 공부는 나몰라라하고 그 조별 과제에 아주 혼신을 다했다. 뭐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누군가의 말이 기억날 정도로, 그 조별과제는 A+를 받으며 성황리에 종료, 물론 재수강의 위험이 도사리는 전공들은 무시해버리고서는 말이다. 웬일로 힘을 쓴 니노미야와 원래 조별과제쯤 단도리 잘하는 사쿠라이 덕에 좋은 점수를 받은 다른 조원들이 밥이나 먹자며 저녁 자리를 마련했는데 역시나 둘은 품을 덜 들이고 받은 좋은 성적에 기분이 상기됐는지 말없이 젓가락질이나 하는 사쿠라이와 니노미야를 두고 한참을 달리다 먼저 뻗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들의 템포에 맞춰 하염없이 또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던 니노미야도 아직 안색이 멀쩡한 사쿠라이에 비하면 충분히 취해 있었다. 그래서 사쿠라이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틈에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향했는데, 그때 반쯤 열어버린 문 밖에서 들리는 것은 어쩐지 곤란한 듯한 사쿠라이의 목소리였다.

“그래, 응. 아니. 아니라고 했잖아, 그건. 나 복학하구 이것저것 맡아서 바쁘다고. 교수님이랑도 몇번 더 만나야 하고, 응. 미안해요. 응. 아니, 그렇게 말할 건 없잖아요. 미안하다고 내가 아까부터 몇 번이나... 내가 잘못했다고 했는데. 내가 잘못했다구요. 아니에요, 화 안 났고, 미안해서... 응. 알아. 안다고, 바쁜 거.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나도 형 보기 싫어서 안 나간 거 아니라고 그때부터 도대체 몇 번을... 하... 형, 우리 둘 다 바쁘잖아요. 그날은 갑자기 수습해야 되는 게 있어서 연락을 못 했다고, 미안하다고, 다음부터는 그런 일 있으면 제일 먼저 얘기하겠다구요. 네. 네 얘기해요. ... 그래서요?”

초인적인 힘으로 숨소리를 죽여가며 귀를 바짝 기울인 덕에 이미 잔뜩 화난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그 사람은 거의 소리지르는 듯한 볼륨으로, 이럴 거면 우리 그냥 헤어지자,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사쿠라이는 거의 일 분 넘게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제멋대로 또 뭐라고 지껄이더니 사쿠라이가 말이 없자 전화를 끊었다. 니노미야는 자리로 돌아가 뻗어 있는 두 사람의 전화기로 각자의 룸메이트와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 주고 자기 가방을 챙긴 뒤 계산하려고 했으나 이미 결제되었다는 말에 허망해질 뿐이었다. 뻔했다. 계산을 누가 했는지는.

분명히 형이라고 했다. 상대방에게. 또 들리는 목소리도 확실하게 남자였고, 통화하는 내용도 흔한 사랑 싸움에 지나지 않았으며, 헤어지자고 한 말까지 들었으니 연인 사이의 전화통화라는 건 옆집 복돌이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쯤 대학교에서는 꽤 자주 보는 일인데도, 왠지 사쿠라이의 그런 통화는 보다 사적으로 느껴졌고, 덕분에 보지 말아야 하는 걸 봐 버린, 부모의 밀회를 마주한 자녀 같은 기분이 되었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일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을 무렵, 밀린 레포트 작성에 동방에서 아주 늦게 집으로 가려고 빠져나왔을 때 학교 후문에 대학생이 탈 법하지 않은 검은 세단이 주차돼 있는 걸 목격했다. 그 세단 앞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사쿠라이 쇼라는 걸 알자마자 니노미야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학교까지 올 일은 없잖아요. 나 바쁘다고도 했고.. 나카무라 씨한테 형 바쁘다고 언질도 들었어요. 막차도 안 끊겼는데 굳이 데리러 올 필요도 없구. 나 보기 싫은 거 아니었어요?”

“그래. 너 미워. 다른 모든 게 다 중요해서 나 같은 건 1순위로도 쳐 주지 않는 너 말이야. 그런데 내가 너보다 너댓 살은 더 많고, 사회 생활도 더 많이 했고, 학교 같은 거 나도 이미 졸업했으니까. 데려다 주려고 오는 게 애인으로서 아주 못 할 일이니?”

“제가 그때부터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도대체 몇 번을 얘기했는지, 형은 기억도 못하죠. 내가 더 어리고, 경험도 적고, 그러니까 그냥 형이 화내면 나는 다 받아주고, 헤어지자고 하면 모른 척하고 있다가 형이 없던 말인 것처럼 다시 잘해주기 시작하면 바보처럼 좋다고 웃어주기나 하고, 형, 저, 그런 거 이제 싫어요. 나 작년에도 형 때문에 휴학했잖아요. 그래서 그때 이후로 학교로는 오지 말라고, 내가 역까지 갈 테니까 차라리 거기에 있으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형, 형은... 형 말은 그렇게 중요하면서, 내가 졸업할 때까지 부탁한 그거 하나 정도를 못 들어줘서, 지금도 여기 누가 이 얘기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까지 싸우는 거 동네방네 다 소문내야 해요? 모르겠어... 나도 지쳤어요. 이제 그만해요. 진짜로 그만해요.”

“너 진심이야?”

“네. 진짜 진심. 정말로요. 헤어져요, 이제. 형도 슬슬 결혼할 나이잖아요. 선자리도 제법 들어오죠?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살 줄 아는 병신인 줄 아나... 알겠으니까 이제 저 같은 남자 대학생이랑은 그만 만나고, 그냥,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세요. 나는 그런 건 못하겠어. 안 데려다 줘도 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타.”

“됐어요.”

“니 말대로 해 줄 테니까. 마지막으로 다섯 살이나 많은 형 차 얻어타라고. 나도 체면이란 게 있어. 데려다 줄게. 타.”

누가 이 얘기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라는 대목에서 몸을 약간 움츠렸던 니노미야는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과 함께 사쿠라이가 이쪽으로 오려는 걸 알아서 다급하게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방금 전 화내던 목소리에서 금세 가시가 빠지고 부드러워진 그 형이란 사람의 목소리에 멈춰선 사쿠라이가 손목이 붙잡혀 조수석에 앉은 채로 후문을 넘어 도로로 빠져나간 걸 알고 나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자리에 눕자 또 아까 전의 장면이 생각났다.

과연 집 앞에 내리고 나서, 사쿠라이는 그 형이라는 사람과 헤어졌을까? 정말로 그만하게 된 걸까?




다음 날 왠지 핼쓱해 보이는 사쿠라이와 마주쳤다. 흡연구역에서. 분명 이 학교에 흡연자가 둘뿐일 리 없는데도 어쩐지 자꾸만 이 흡연구역엔 둘밖에 없었다. 니노미야를 본 척도 하지 않고, 평소와 다르게 줄담배를 피우던 사쿠라이에게 니노미야는 대뜸 말을 걸었다.

“선배. 그.. 애인이랑. 애인이랑 헤어졌어요?”

“응?”

“아니, 그... 제가 어제 집 가다가 들은 것 같아서... 헤어지자고 하는 거요.”

“뭐가?”

“선배 남자 좋아해요?”

“누가?”

아주 정색한 사쿠라이는 니노미야의 질문에 그렇게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니노미야는 누가? 라는 말에 선배요, 라고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있으니 사쿠라이가 헛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 남의 대화 엿듣는 취미가 있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집 가려는데 들려서... 근데 거기 지나가려니까 너무 방해하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끝날 때까지...”

“누구한테 말했어?”

“말 안 해요. 저 입 무거워요.”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마. 너도 그냥 잊어버려.”

사쿠라이가 빈 담뱃갑을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구기며 그렇게 읊조렸다.

“네.”

니노미야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 대답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사쿠라이는 니노미야를 지나쳐 갔다. 사람이 지나갈 때 일어나는 바람이 어쩐지 마음에도 들이친 것 같아서, 그 매몰차고 싸늘한 반응에 괜히 어딘가가 아려서, 그것은 분명 사쿠라이가 피우는 독한 담배 연기 때문일 것이라는 핑계로 니노미야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쳤다.

연강이 끝나고 동기를 꼬셔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놓고는 말도 하지 않고 술잔만 기울이자 장단을 맞춰 주던 동기는 금세 짐을 챙겨 집으로 떠났다. 처음에는 자기가 모르던 여자 친구가 있느냐, 차였느냐, 뭐 연애 사업이 잘 안되느냐 하는 뻔한 질문들만 했는데, 니노미야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질문할 의욕도 잃어버린 듯했다. 고개가 거의 테이블에 처박힐 정도가 되자 짐을 챙겨서 역으로 향했다. 휘청거리면서 플랫폼에 선 채 가만히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선배와 동기의 휴대전화를 뒤져 알아낸 사쿠라이의 전화번호를 찾아 띄웠다. 열차를 한 대 보내고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절전모드라서 휴대전화 액정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 전화번호를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다음 열차가 들어오며 내는 빵 소리에 놀라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서둘러 수화기를 귀에 대자 대기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사쿠라이가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전화도 바로 받는구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열차에 올라타자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문 가까이에 선 채로 니노미야가 얘기했다.

“선배... 저, 저... 니노미야입니다. 2학년. 사회학과. 아시죠, 저.”

“응, 알아. 왜? 무슨 일?”

“아, 뭐, 일은 없어요, 저어.. 근데 제 번호, 아셨어요?”

“아니, 근데 니가 전화했잖아.”

“아, 그렇지. 선배는.. 모르는 전화도 그냥 다 받으시는 거예요?”

“늦은 시간에 오니까 받은 거야. 용건 없으면 끊을게.”

“아, 아니에요, 저, 할 말 있어서,”

“그래? 그럼 빨리 해 줄래? 나 바쁜 거 너도 알지?”

“예, 알아요. 알죠. 알아요. 죄송해요, 전화해서.”

“알면 빨리 얘기해.”

“저... 형이 좋아요. 형이 좋아서... 잘보이고 싶어요. 그러니까요... 저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전에 그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앞으로도 할 일 없어요. 근데요... 근데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형 남자 좋아하는 거요. 저 아무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형이 보신 거요, 제가 그때도 말했지만, 그거 다 진짜로 다, 제가 싫다고 했는데도 당한 거니까, 저 그렇게 걸레 아니니까... 사쿠라이군, 부탁할게요. 저 미워하지 마세요.”

역에 도착해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타거나 내리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술냄새를 풍기며 낮은 목소리로 웅얼대는 니노미야를 쳐다보고는 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오로지 알코올에 축축하게 젖은 정신은 수화기 너머의 고요해진 숨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그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사쿠라이는 일 분이 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 알았어. 나 너 미워하지 않아. 근데 취했니? 지하철? 내릴 곳 놓치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 술기운까지 빌려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니노미야. 알겠으니까, 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끊을게?”

“네, 네. 네. 죄송해요. 아니, 감사해요.”

지하철 덜컹이는 소리가 심장 뛰는 소리 같다. 전화가 뚝 끊기고 나서야 지하철 안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쿠라이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으로 니노미야, 라고 불렀다. 야마노테선의 경쾌한 하차음. 이어서 출발음. 사쿠라이가 말한 대로 잔뜩 취했는데도 니노미야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다음 역에서 내렸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뿐했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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