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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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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7. 09.









간단하게 살 수 있다면 간단하게 살자고. 간편하고 저렴하게 살 수 있으면, 그렇게 하자고. 

그래서 찾은 길은 객들이 뒷주머니에 앞주머니에 술잔에 꽂아주는 지폐가 나츠메 소세키인 것으로. 퇴근할 땐 반짝반짝 잘 닦인 구두를 신발장에 넣어 두고, 향수 냄새가 뒤섞여 이젠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는 반질반질한 셔츠나 바지 따위는 들고 왔던 아무 비닐봉투에 집어넣은 뒤,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고 캡모자를 쓰면, 지나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호스트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평범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비주얼이 됐다.

너는 돈을 왜 버냐. 언젠가 같이 담배를 피우던 셔터맨이 그렇게 물었다. 돈... 있으면 좋잖아요. 많으면. 그러나 돈이 있어도, 돈이 아주 많이 있어도 쓸 곳은 마땅히 없었다. 가족이 없으니 부양할 것도 없었고, 물욕이 없으니 지갑에 구멍이 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잔고만이 꼬박꼬박 몸을 불려갈 뿐이었다. 그러니 만족할 만큼이 된다면, 언제든 이 일따위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트럭에 얼굴 붙이지 마세요. 저 그런 거 안 해도 잘 벌잖아요. 솔직히 나 없으면 안 되잖아요 당분간은. 싹싹한 태도로, 맑게 웃으며 그렇게 얘기한 덕에 시부야나 신주쿠 번화가 언저리를 하염없이 맴도는 트럭에는 이름 한 글자 붙어 있지 않았다. 호객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아도 매출은 상위권. 사고를 치는 일도 없었고, 손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도, 대어를 놓치는 일도 없었고, 뭐랄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할 일을 다 가져다 했다. 심지어는 폭탄처리반에 가깝게, 다들 꺼리는 객도 니노미야는 꺼리지 않고 자기 앞으로 돌려놓고 맡아 처리했다. 

에 뭐. 전 몸으로 승부하는 스타일도 아니고요. 

동질감을 원하면 나도 바다가 보이는 데에서 컸다고 했고, 그게 아니라 생경한 곳에서 자란 이의 감탄을 원하는 듯하면 산골에서 자랐다고 했다. 눈이 내리는 곳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면 자기도 눈이 좋다고 했고, 지겹다고 하면 자기도 사는 내내 눈을 실컷 봐서 지겹다고 했다. 너 몇살이니? 그렇게 묻는 사람에겐 누나보다는 어리죠, 했고,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는 여자애에겐 그러라고 했다.

넌 진짜가 뭐냐?

여기서 진짜를 얘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모두모두 거짓을 쓰고 일하고 거짓을 쓰고 웃었다. 그럼 손님들은 그 잘 만들어진 거짓을 모른 체하며 값을 지불했다. 그러니 얼마나 거짓을 거짓답지 않게 말할 수 있는지, 거짓을 얼마나 잘 다듬어 내보이는지, 실은 그런 대결 아닌 대결을 하는 곳인 것뿐.

야 돈 못 버는 놈은 당연히 못 벌고. 잘 버는 놈은 빌딩을 세 채 사고도 남을 정도로 벌어. 근데 그놈들 다 여기 못 떠나. 왜? 여기만큼 땡길 수 있는 데가 없으니까. 여기서 형편 좋게 일하려다가 남 밑에서 대가리 굽실대며 일할래봐. 할 수 있겠냐? 여기에 너무 적응하면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는 거야.

그래도 니노미야는 항상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했다. 아니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걸 원했다. 나중엔 적당히 취직하고 적당한 여자를 만나 적당한 가정을 꾸리는 게 인생의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굴도 팔지 말아 달라 했고 적당한 원동력 빼고는 땡겨 쓴 적도 없었고 돈은 쓸 일 없이 저금했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니 절대 에이스까지는 아니어도 잭, 그게 아니어도 10번까지는 되는 니노미야였기에 광고는 싫다 삐끼질도 싫다는 걸 내버려 둔 거다. 그리고 마담은 처음부터 알았다. 원하는 날 이곳에서 훌쩍 발을 빼버릴 놈이라는 걸. 빼고 싶어한다는 걸. 그런 것쯤이야 하루이틀 일하는 걸 보면 답이 나왔다. 그래도 그냥 둔 이유는... 그 원하는 날이 한참 멀었다고 보였기 때문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에는 노력하지 않아도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니노미야 아니면 군말없이 폭탄처리반을 해 줄 사람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도 있다. 그야말로 요즘 애들이란 지들 편한 것만 하려고 하니까.




이 신난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저런 표정이라니. 그건 분명 오기 싫은데도 억지로 와 버린 사람일 테고. 그런 사람에게 은근히 정신이 팔리는 것도 취향이려니 병이려니. 눈 한 번 깜빡했더니 그의 옆만 빼고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셨다. 얼른 가고 싶어 안달난 사람은 싫다 이거지. 돈줄이 안 될 것 같으니까. 다 이해한다. 이왕이면 진득하니, 트러블 없게, 가늘고 길게, 한 사람한테서만 받아먹으면 편하니까. 

니노미야는 홀로 앉아 우롱차나 홀짝이는 그 남자 옆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였다. 남자는 기척을 아주 늦게 알아챘다. 자리에서 떠나버릴 것처럼 펄쩍 뛰길래 니노미야는 웃으면서 남자의 어깨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이런 데 처음이에요?”

“아 네. 저. 실은 제가 혼자 올 일도 없기도 하고.”

“그런데 오늘은 왜 왔어요?”

“저. 동료분들이 같이 가 달라고 하셔서...”

“회식을 이런 데로도 와요?”

“저는 잘.. 잘 모르죠. 그런데 괜찮다고 하셔서.”

“아하. 다들 신나 보이는데.”

“네 저, 기자입니다. 그래서...”

“아, 그래요?”

“뉴스, 안 보시나 보네요...”

“예 뭐. 볼 일 없죠. 요즘은 그. 인터넷 뉴스도 있고 하잖아요.”

답지 않게 말을 자꾸 씹었다. 목구멍에 기름이라도 칠한 듯 술술 흘러나오던 대화들이 맥을 못 추고 끊겨댔다. 니노미야는 남자 앞에 있던 우롱차를 멋대로 한입 했다. 남자는 놀란 듯 손을 움찔했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기자면... 뉴스... 그럼 티비에 나오시는 거 아니에요? 이런 데 와도 되는 거예요?”

“네 그.. 저 그래서 안 온다고 했는데.... 어차피 전 남자고. 만약 걸리면 무슨 일 있을까 봐 저 데리고 온 거라고, 그렇게 해 주신다고 해서.”

“요즘 이런 데에서 무슨 일이 또 난다고...”

“그러게요.”

그러게요. 그 말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남자는 다시 목을 축였다. 남자의 동료들은 신난 듯 다들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니노미야는 왠지 모르게 자신도 할 말이 없어져서 조용히 있었다. 이렇게 정신 사나운 공간에서 이만큼 조용히 있었던 적이 없었다. 늘 오디오가 비지 않게 떠들어야만 했다. 그러니 니노미야는. 아주 오랜만에. 이런 정적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와는 그 뒤로 시답잖은 서로의 직업 고충이라든가 내일 날씨라든가 하는 얘기를 적당히 하고, 한껏 신난 다른 동료들이 가게를 떠날 때에 헤어졌다. 그러니 제발로 이런 곳에 혼자서 걸어들어올 리 없는 그 남자와는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기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꼴을 한 채 재회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로 하시죠...”

“넌 뭐야?”

“폭행하시면 경찰 부릅니다.”

“이 자식이 내 여친을,”

“그쪽 여자친구가 나한테 온 거죠, 내가 오라고 꼬셨나, 난 그런 거 안 하거든요,”

“뭐 이 새꺄?”

“그만... 그만하세요. 지금 사람들이 다 봅니다. 말로 하세요.”

“그래요. 쪽팔리니까 시선 그만 끌어요.”

모르는 남자와 니노미야 사이에 저번에 만난 남자가 쑥 끼어들었다. 당장이라도 흠씬 두들겨맞을 것 같은 분위기에 남자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 

“이게 미쳤나.”

“그쪽히 어지간히 잘해줬으면 이런 데 안 왔겠죠. 저라면 이럴 시간에 그 여자친구 찾아가서 한마디라도 더 하겠습니다.”

“당신은 뭐야? 한 패거리야?”

“아니요. 모르는 사이입니다. 폭행하시면 진짜 경찰 불러요.”

경찰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었는지 주먹을 휘두르려던 남자는 꽁무니를 뺐다. 니노미야에게 욕 한 번 더 해 주고 도망가는 건 잊지도 않았다. 그림자도 안 보일 무렵이 되어서야 니노미야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저번에 만난 남자가 뒤를 돌았다.

“안 맞았어요?”

“네. 덕분에.”

덕분에. 라는 말 뒤에 니노미야는 바싹 마른 손으로 얼굴을 한 번 훔치고 입을 다시 열었다.

“고마워요. 근데 우리 본 적 있죠.”

“네 저번에.”

“근데 그때 이름을 안 알려줘가지구요. 제가 지금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어요.”

“아. 저 사쿠라이 쇼라고 합니다. 명함 드릴게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해산하긴 했지만 그래도 눈길이 무서워 둘은 인적 드문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니노미야는 남자가 양손으로 건네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명함이라니 번듯한 직장인이라는 게 실감났다.

“어쩌자고 끼어들었어요? 모른 척해도 되잖아요. 호스트 변호해주는 기자라고 염상날지도 모르는데.”

“그런 거 알 만한 사람이었음 제 얼굴 보자마자 어 했겠죠. 아니에요. 저 신입... 말단이라 아직 많이 나오지도 않고요. 아직은 땜빵이 더 많아요. 그냥 싸움날까 봐 말렸다고 하면 그만이고.”

“그래요. 그렇구나. 이런 거 그냥 못 지나치는 성격인가 보다.”

벽에 느슨하게 기댄 니노미야는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피워도 괜찮냐는 뜻이었다. 사쿠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붙이고 한모금 빨아들인 뒤 니노미야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정면에 연기를 뱉어냈다. 사쿠라이는 눈을 조금 찌푸렸지만 군소리 없었다. 어라 이것 봐라. 어쩌면 그런 마음일지도 몰랐다.

“내일 주말인데 출근해요?”

“아니요. 내일은 출근 안 합니다.”

“왜 이렇게 딱딱해요. 괜찮으면요, 한잔 해요. 제가 살게요.”

“네?”

“우리 집 여기서 가까워요. 내일 쉰다면서요. 저도 늦게 출근하거든요.”

“괜찮으시면... 실례하겠습니다.”

“네. 도와줘서 고맙다고 사는 거예요.”

사쿠라이는 생각도 못 한 제안이었는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알겠다고 했다. 그런 성격에 괜히 부채감 느낄까 니노미야는 이유까지 덧붙였다.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운동화로 짓이긴 뒤 니노미야는 이제 가자고 턱짓했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적당히 산 뒤 니노미야의 집으로 함께 올라갔다.

짐은 대충 던져두라고 했는데도 사쿠라이는 현관 근처에 반듯하게 서류가방을 세워 뒀다. 니노미야는 먼저 소파 앞에 가서 앉았다. 살면서 두 번째 본 남자의 집에서 같이 술이나 마시게 된 상황이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지 사쿠라이는 멋쩍게 그 옆에 앉았다. 이해가 안 될 법도 했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는 사쿠라이가 내심 웃겼다. 니노미야는 먼저 맥주캔을 하나 따서 건네주면서, 고마워서 사는 거예요, 하고 한 번 더 덧붙였다. 내내 긴장한 얼굴이던 사쿠라이는 그제야 살짝 웃으면서, 네, 감사해요, 라고 했다. 

술이 들어가면 조금 터놓고 얘기할까 싶어서 그랬다. 니노미야는 괜히 사쿠라이가 홀짝이기를 재촉했다. 결국엔 사온 술을 2:1 정도로 나눠 마신 둘은 얼굴이 조금 벌개져 있었다. 티비도 켜지 않고 불만 작게 켜둔 채로 둘이서 하염없이 얘기를 하거나 때로는 조용히 있었다. 니노미야에게는 이런 정적이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조금 졸린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사쿠라이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키스했다. 사쿠라이는 놀라지도 않고 키스를 받아줬다가, 또 느리게 반응하며 니노미야를 확 밀어 떼어냈다.

“이... 이런 거 하지 말죠.”

“왜요? 싫어요?”

“아니... 저 돈도 안 냈고. 그럴 사이도 아니고......”

그럴 사이라는 건 뭐지. 그러는 사이. 앞선 말과 뒷선 말이 서로 부딪히는 거 아닌가. 밀쳐진 채 가만히 있던 니노미야는 고개를 삭 들어서, 손님들에게 하는 얼굴에 웃음을 얹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거절쯤.

“괜찮아요, 돈 안 내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요. 싫었으면 사과할게요.”

“아, 아니... 퇴근했죠?”

“네. 뭐. 아니에요. 죄송해요, 키스해서. 싫어하실 줄 몰랐어요.”

“아니에요. 아니, 잠깐만, 저기! 저 싫다고 한 적은 없... 없거든요.”

상체를 사쿠라이 쪽으로 숙이고 있던 니노미야가 몸을 살짝 뒤로 물리자 사쿠라이는 지레 놀라 다시 바닥을 짚고 있던 니노미야의 팔을 확 잡아끌었다. 




한 가지 약속했다. 보고 싶으면 니노미야의 집에 오기로. 역시 가게는 좀 그렇죠. 네 좀. 그럼 집 알려주기도 좀 그렇죠. 네 지금은 좀. 그래요 그르면. 우리 집으로 와요. 여기가 직장이랑도 더 가깝죠? 저 밤에는 잘 없으니까 제가 그냥 열쇠 하나 줄게요. 오고 싶을 때 오세요. 자고 가도 되고요. 정말로요? 네. 보고 싶으면 오기로 했는데요. 저 그렇게 안 보고 싶을 것 같아요? 모르죠. 네 그래요.

헤 그래요. 여자들은 의외로 멍청한 남자애들을 좋아했다. 가르치려고 하는 남자를 싫어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내 말버릇은 그래요, 몰라요, 진짜요, 그 언저리. 대충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장구나 잘 쳐주면 그만. 알콜이 입천장을 한바퀴 돌고 목젖을 탁 치고 식도를 타고 주르르 내려갔다. 잘 빠진 듯한 싸구려 스트레이트잔을 깨지지 않게 탁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잔을 권한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싹 웃었다. 나 잘했어요? 그런 웃음을.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오늘의 객은 간만에 오신 누님. 나한테 마지막 잔을 권하면서 그렇게 속삭였다. 싸구려 비아그라 같은 거, 아직도 하니? 이제 그만 먹어. 잔을 꺾으면서 속으로 대답했다. 나 그런 거 안 먹어요. 누구랑 헷갈린 건지 모르겠네. 그런데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취해서 무슨 말을 해버릴지 몰랐다. 그래서 또, 그냥 잔을 비우고 전처럼 씩 웃었다. 뒷주머니에 몰래 지폐를 꽂아주고 누님은 떠났다. 떠나면서, 다시는 안 온다고 했다.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앉아 있는 사쿠라이가 있었다. 니노미야는 푸, 하고 숨을 내뱉었다. 자꾸 헛발질하느라 신발이 잘 안 벗겨졌다. 사쿠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단숨에 와서 신발을 벗겨줬다. 니노미야는 어깨에 체중을 맡긴 채로 눈을 맞추고, 또 아까 전처럼 웃었다. 그러나 사쿠라이는 그 웃음에 답장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매정하게도 느껴졌다.

“여기요.”

니노미야를 부축한 채로 잔에 물을 따른 사쿠라이가 니노미야의 입가에까지 잔을 가져다 댔다.

“하.......”

“많이 마셨어요?”

“네... 하... 아 그. 좀 독해서요.”

“아.”

잔을 돌려받은 사쿠라이가 말없이 니노미야를 다시 부축했는데, 소파로 갈지 침대로 갈지 고민하는 것 같아서 니노미야가 옆구리를 찔러 침대로 가자고 했다. 사쿠라이는 침대에 니노미야를 눕혀주고는 바로 거실로 나가려고 했다.

“오늘 나 보고 싶었어요?”

“네?”

“내가 보고 싶으면 오기로 했잖아요.”

“그럼 그런가 보죠.”

“왜 이렇게 불퉁해요.”

“내가요?”

“네. 지금 삐친 사람처럼...”

사쿠라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조명을 등진 채 바로 섰다. 니노미야는 괜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나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얼굴 봤으니까 이제 갈게요. 실례했습니다.”

기다린 듯이 짐을 챙겨 잡기도 전에 집을 빠져나갔다. 보고 싶으면 오기로 했다지만 봤다고 바로 가 버리는 건 생각도 한 적 없었다. 니노미야는 침대에서 나와서, 사쿠라이가 오래 앉아 있었던 게 분명한, 그 부분만 뜨끈해진 방바닥에 누워서, 아주 불편한 채로 잠들었다.




다음 날 사쿠라이는 낮에 찾아왔다. 그날 니노미야는 휴무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몰랐다고 했다. 그럼 그냥 온 거예요? 네 퇴근 기다리려고 했어요...

“어젠 미안했어요.”

“뭐가요?”

“가버린 거요. 그냥.”

“아. 화났었어요?”

“그럴지도요. 잘 모르겠어요.”

사쿠라이는 넥타이를 조금 끌러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얼굴이 마주쳤는데 곤란해 보였다. 살면서 이런 경험은 한 번도 한 적 없는 것처럼. 턱을 좀 긁적이다가, 어쩐지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어제 같은 일은 저도 잘 없어요. 그렇게 취하는 거. 뭔가 못 볼 꼴 보인 건가 싶기도 하고. 저도 미안했어요.”

“니노미야 씨가 미안하실 필요는...”

“대신 이젠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요, 그냥 보고 싶으면 와요.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요.”

대답하려고 입을 몇 번 뻐끔거리던 사쿠라이는 이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노미야는 또 전과 같이 씩 웃었다. 그러면서도 사쿠라이 앞에서 어떤 태도를 고수해야 할지 몰랐다.


니노미야의 요구 아닌 요구대로, 사쿠라이는 꽤 자주 니노미야의 집 문짝을 열어젖혔다. 대체로 니노미야보다 먼저 와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가끔은 안경 따위가 얹혀 있기도 했다. 밥을 같이 먹기도 했고 식사는 생략한 채 음주로 넘어가기도 했다. 때때로 디저트를 들고 온 누군가에 의해 포크를 들기도 했다. 그런 만큼 종종 키스했다. 그건 대부분 니노미야가 먼저 움직인 결과였다. 혀끝을 뾰족하게 해서 입천장을 살살 건드리면 등을 파르르 떨었다. 그 신호에도 멈추지 않고 괴롭히기 시작하면 사쿠라이는 니노미야의 팔뚝을 콱 잡아 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니노미야는 또 예와 같이 웃어 주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를 못했다. 못했는지 아닌지는 둘 중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늘 니노미야를 꽉 붙들어 오는 사쿠라이 탓에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어쩐지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냥 담배를 한 대 더 태웠다. 그냥 그렇게 끝내려고 했다. 급한 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미적지근하게만 유지하고 싶지도 않았다. 



책상을 발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운 채 니노미야는 사쿠라이의 가슴팍을 막 문질렀다. 셔츠가 부드럽게 손에 감겼다. 제법 난폭하게 만져댔는데도 주름이 별로 지지 않았다. 니노미야는 그대로 손을 사쿠라이의 가슴 언저리에 올려둔 채 자신의 반지르르한 실크 셔츠를 생각했다. 되도 않는 무늬들이 어른대고 주름을 숨기기 위해 반들한 소재로 된 그 셔츠를. 사쿠라이의 것과는 한 올부터 다른. 손 대신에 뺨을 가져다 대면서 문득 두 사람도 그런 것이리라 생각했다. 다르다면 세포부터. 사쿠라이의 엄지손가락이 니노미야의 귓등을 건드렸다. 날렵하게 빠지진 않았어도 부들부들한 손끝이 귓불에 닿았다. 말 없이 자꾸만 귀를 만져댔다. 니노미야는 그 손을 쳐내지 못하고 얼굴을 더 파묻었다.

성냥을 착, 하고 켰다가 그게 다 탈 만큼 가만히 바라보고, 흔들어 끄고, 눈앞의 맥주캔에 꺼진 성냥을 쏙 집어넣고, 다시 성냥 하나를 꺼내 켜고, 바라보고, 켜고, 바라보는 것을 반복한다. 그걸 지켜보던 사쿠라이가 재떨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가다 말고 슬그머니 밀어준다. 니노미야는 숫제 짓는 표정으로, 눈썹을 끌어올리며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안 피워요?”

“뭘요?”

“담배. 피웠잖아요, 원래.”

“아. a코가 싫다고 해서, 당분간은.”

아쉽다는 건지 슬프다는 건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은 니노미야는 다시 재떨이를 원래 있던 쪽으로 쭉 밀어주며 성냥 하나를 또 꺼냈다. 

“그럼 나도 피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괜찮아요. 한번 씻고 나가면 되지. 옷이야 가서 갈아입는데요, 뭐.”

“손님들이 그런... 자세한 것까지 요구해요?”

원래는 참으려는 말이었는지 물음표를 끌어당기려는 듯 급하게 숨을 들이킨 사쿠라이가 멋쩍게 니노미야를 쳐다봤다. 

“요구라고 해야 되나? 암튼요. 싫다고 하면 좀 참고, 해달라고 하면 해주는 거죠. 어려운 일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직업이니까, 뭐, 싫어도 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도 담배는 쪼끔. 슬슬 땡길 때긴 하네요. 간접흡연으로 참아야지.”

들고 있던 성냥을 흔들어 끄고 재떨이에 던져넣은 니노미야가 책상을 짚은 채 상체를 앞으로 확 숙였다. 숨을 멈추고 굳어 있는 사쿠라이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쌉싸름한 냄새가 파인애플 냄새와 섞여 코 안으로 밀려들었다.

“맛있는 냄새 나요.”

“못 피워서 어떡해요.”

“그런 말은 아닌데.”

“아. 식사 시간이긴 하네요.”

“됐어요. 저 출근 날은 잘 안 먹어요, 밥.”

“괜찮아요? 빈속으로.”

“네에. 오히려 뭐 먹으면 더부룩하구요. 괜찮아요.”

벌떡 일어난 니노미야는 씻기 위해 티셔츠를 훌떡 벗으며 말했다. 실내복 바지도 벗어 개는데 속옷이 시뻘건 색이었다. 사쿠라이가 그걸 자기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았다.

“원래 되는 대로 입고 다니는데 삿쨩이 빨간색 짜증 난다고, 싹 버리라더니 검은색으로 사 줬어요. 스무개나.”

“지금 거 빨간색인데.”

“왜 버려요. 출근 때 안 입기만 하면 되지.”

“빨간 팬티를 입는구나.”

“예. 뭐. 보라색도 있었고 흰색도 있었죠. 줄무늬도 있었고 트렁크도 삼각도 있었어요. 웃기죠.”

“호스트가?”

“네. 그러면 안 돼요?”

“흐흐흐. 난 그런 거에 젤 신경 쓸 줄 알았는데.”

“저 그래도 지조라는 게 있어요. 아무 데서나 바지 안 내리거든요.”

사쿠라이가 막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에 공기가 잔뜩 섞인 채로 말하자 니노미야는 괜히 더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내 눈 앞에서 팬티만 입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모른 척 샤워하러 들어가자 등 뒤로 사쿠라이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날 그 웃음소리가 잊히지 않아서 자꾸만 실수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대꾸를 반박자 늦게 했다. 원래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 손님들만 와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퇴근 전 마지막 손님은 오히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아니냐면서 반대로 걱정까지 해 줬다. 우웅 그런가 나 열은 안 나죠? 하면서 손님의 손을 이마에 가져다댔다. 손님은, 응, 열 안 나. 그런데 손이 조금 차갑네, 라고 했다. 

돌아가는 길에 손을 계속 주무르며 걸어갔다. 손이 차갑다는 얘기는 최근 들어 자주 듣고 있었다. 원래 그냥 적당한 온도였는데 무슨 일인지를 니노미야 자신도 몰랐다. 시간이 늦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테이블을 조금 밀어 두고 사쿠라이는 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그 앞에 가서 사쿠라이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쪼그려 앉아서 사쿠라이의 손을 잡아 봤다. 특별히 차갑지 않았다. 조금 따뜻하게 느껴지는 손바닥이 부드러웠다. 니노미야가 그 손을 다시 원래대로 내버려두고, 테이블을 더 옆으로 밀면서, 몸을 숙여 입맞췄다. 피곤했는지 사쿠라이는 깨지 않았다. 앉은뱅이 책상을 다시 보니 서류들이 제법 쌓여 있다.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니노미야는 차가운 손으로 바지 허리춤을 잡아 끌었다. 등허리를 확 치고 지나가는 충동이 사그라들지가 않는다. 그대로 사쿠라이의 바지를 벗겨 아무데나 던져두고는 허벅지 가장 안쪽을 더듬었다. 입맞추는 동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제야 사쿠라이의 표정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니노미야는 사쿠라이 다리 사이에 자리하고 이제는 자신의 바지를 잡아 내렸다. 부피를 키우기 시작한 성기를 쥐고 달랬다. 근처를 둘러봤는데 쓸만한 게 없었다. 프리컴에 침을 뱉어 질척한 소리만 났다. 젖은 손으로 다시 사쿠라이의 허벅지 안쪽을 만졌다. 얼마 안 있어서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

“아. 깼어요?”

“지금 뭐 해요...?”

“허벅지 한 번만 빌려주세요. 미안해요, 갑자기. 근데 저도 못 참겠어서. 빨리 끝낼게요.”

“뭐를요?”

니노미야는 대답하지 않고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웠다. 앞뒤로 문지르자 생경한 감각에 사쿠라이가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니노미야는 그걸 대충 붙들어 두고 계속했다. 답지 않게 사쿠라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니노미야 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만해요 이런 거... 그런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먹먹하게 들렸다. 귀에 물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소리가 너무 멀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왔다. 자위를 처음 해 본 청소년처럼 답지 않게 조급해졌다. 니노미야는 바쁘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고개를 숙여서 사쿠라이에게 입맞췄다. 사쿠라이가 도망가려고 몸을 계속 빼는데 니노미야는 여전히 차가운 손으로 그걸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꾸만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니노미야도 영문을 몰랐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풀어버리려는 듯이 한참을 입술로 더듬었다. 정수리에서부터 이마 눈두덩이 콧잔등 살짝 부푼 볼 아랫입술 턱끝 목덜미 불툭 튀어나온 쇄골뼈 그아래 가슴팍 손으로는 몸 어딘가를 다급하게 비비거나 더듬으면서 정말로 목마른 사람처럼 어디든 상관없이 입을 대고 깨물어댔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한번도 이렇게 원하고 이렇게 갈급해하고 이렇게 모자란 것은 없었다.

정액이 튀는 동시에 니노미야가 숨을 헉 하고 내뱉었다. 그제야 눈앞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이 잔뜩 벌개져 있는 사쿠라이는 셔츠가 다 풀어헤쳐진 채로 여전히 니노미야의 팔뚝을 붙잡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원망하는 건가?

“미안요. 미안해요. 정말.”

“왜 사과해요?”

“사쿠라이 씨 안 깼으면 더 했을까봐서.”

“파렴치해...”

사쿠라이의 손에서 힘이 점점 풀려갔다. 손은 얼굴로 향했다. 팔뚝이 표정을 가렸다. 우는 건가?

니노미야는 말 없이 티슈로 뒷처리를 했다. 사쿠라이는 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니노미야가 자리에서 조금 멀어지자 그제야 일어섰다. 샤워 빌릴게요. 대답을 듣지 않고 사쿠라이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동전이 날아와도 가만히 있었고 재떨이가 날아와도 샴페인 잔이 지폐가 안주가 사람의 인생이 날아와도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어서, 그걸 그냥 한 번 맞고는 휙 손등으로 털어버리고 다시 웃었다. 그러기를 계속했다. 근데 오늘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쿠라이는 니노미야의 속옷을 아무거나 훔쳐 입고는 짐을 챙겨서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쿠라이는 한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처음엔 미안했다. 니노미야가 잘못한 게 맞았으니까. 용서를 빌까 했다. 그런데 염치가 없었다. 가만히 누워서 명함을 계속 바라보다가, 전화를 할지 말지 막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그만두고 명함을 다시 테이블에 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되어갈 쯤 되어서는 이제 적반하장이라고. 명함에 적힌 곳으로 가서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해가 떨어지고 비가 내렸다. 편의점 오백엔 비닐 우산에 빗방울이 자꾸만 떨어졌다. 사쿠라이가 동료와 함께 퇴근하는 걸 먼 발치에서만 봤다. 여기까지 와 놓고는 정작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린 사쿠라이가 단숨에 니노미야를 알아봤다. 눈썹을 좀 찌푸린 사쿠라이가 동료에게 먼저 가라는 듯 양해를 구하고 성큼성큼 니노미야에게 다가왔다. 말도 안 걸고는 니노미야의 팔뚝을 움켜쥐고 먼저 걸어갔다. 니노미야는 그 발길에 막 이끌려갔다. 질질. 우산을 놓칠 뻔했다.

인적 드문 건물 옆면과 옆면이 만난 골목에 다다라서야 사쿠라이가 손에 힘을 풀었다. 너무 세게 잡혀서 벗어 보면 멍이라도 들어 있을 것 같다. 니노미야가 벽에 기대 서는데도 사쿠라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니노미야를 올려다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왜 기다렸어요?”

“이제 안 올 거예요?”

“어딜요.”

“우리 집요. 나 보고 싶음 오기로 했잖아요.”

알고 있었다. 사쿠라이가 자신을 피하는 것쯤. 그 이유도. 저번에 얼굴 붉힌 유사 성행위가 단초인 건 뻔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먹고 버릴 줄은. 아니 먹은 건 니노미야 쪽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아.”

“나 잊어버렸어요?”

“아니에요.”

“그럼 이제 나 같은 건 보기가 싫어요?”

“그런 건 아니에요.”

비가 점점 거세졌다.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커져서 덩달아 둘의 목소리도 볼륨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요?”

“우리 사는 세계가 다르잖아요.”

“지구 일본 도쿄에 사는 거 아닌가?”

“아니요. 아니. 저 시간대가 바뀌었어요. 니노미야 씨가 출근하는 시간에 저 퇴근해요. 저 출근하는 시간에 니노미야 씨가 퇴근하고요. 우리 그 정도로 생활의 범주가 달라요. 제가 가도 니노미야 씨를 볼 수가 없다구요.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도 없잖아요.”

“그럼 휴일에 만나면요.”

“여태까지 계속 그래왔죠.”

말을 뱉어내던 사쿠라이가 고개를 든 건 답답함이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날 강경하게 가지 않는다고 할 걸 그랬다. 처음부터 엮이지 말 걸 그랬다. 이런 말싸움, 평범한 직장인끼리는 별로 성립도 되지 않는 건수다.

“우리 서로 그 정도... 침범하지 맙시다. 저도 체면이란 게 있고,”

“그래서요. 누가 봐도 나 호스트입니다 하는 꼴로는 말 걸지 말아요? 그럼 무직 니트족처럼은 괜찮아요? 만년 프리터처럼은요? 박사 과정을 십 년 하는 대학원생처럼은요? 내가 어떤 세계에 속해야 하는데요. 내가 얼마나 평범해야 체면을 안 구기게 하는데요. 말 한 번 거는 걸로 그렇게 안 되게 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고 뭐가 되어야 하냐구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벽에서 등을 떼고 항상 보여주던 그 웃음도 어디로 갔는지 싹 걷힌 채 니노미야는 소리지르듯 따져 물었다. 사쿠라이는 그렇게 대답하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또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는데 이번엔 눈이 계속 움직였다. 아무래도 할 말을 골라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와중에도 니노미야에게 상처는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라고 넘겨짚는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열받았다.

“내가 평범해지면요?”

“그럴 수 있어요?”

“왜요? 난 못할 것 같아요? 처음부터 글러먹은 것 같아서? 그런 놈이라 그런 곳에서 일하는가보다 싶어요?”

“니노미야 씨.”

“말해 줘요. 내가 어떻게 해야 사쿠라이 씨 체면을 안 구기는지......”

“사는 건 영화가 아니에요. 체면은 제법 자주 구겨집니다. 특히 기자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할 때도 있고요. 그래요. 미안해요. 내가 괜히 화냈네. 방향이 틀렸어요. 니노미야 씨한테 화낼 거 아니었어요.”

자책 같은 말에 니노미야는 괜히 열받았다. 우산을 집어던지고 사쿠라이의 어깨를 확 밀쳤다. 여기까지 하고 이런 식으로 사과하는 게 어디 있어. 그렇게까지 말해 놓고 금세 숙이는 게 어디 있어. 

“왜? 끝까지 덤벼요. 내가 싫으면 싫다고 안 보러 올 거면 안 보러 온다고. 나만 매일 기다리게 하지 말고요. 연락하면 민폐일까 한 달을 고민하다가 겨우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 이런 식으로... 이렇게 대하는 게...”

“감기 걸려요. 비 맞으면...”

사쿠라이는 헐레벌떡 니노미야가 집어던진 우산을 다시 주워 들었다. 우산을 대 주려고 몸을 가까이 했는데 그 탓에 멱살이 잡혔다. 니노미야는 폭우에 금세 쫄딱 젖은 고개를 사쿠라이의 어깨춤에 파묻었다. 정장 자켓이 젖어도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었다.

말 없이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던 사쿠라이가 불편한지 팔을 움직였다. 니노미야는 고개를 떼어 내고 우산을 쳐내고 사쿠라이의 양 볼을 붙잡았다. 사쿠라이가 다시 우산을 주우러 허리를 숙이기 전에 키스했다. 빗물이 입술 사이로 자꾸 흘러들어왔다. 아직 멈추지 않은 눈물도 섞여서 짠맛도 느껴졌다. 그전처럼 입천장을 훑어내자 니노미야를 떼어내려고 붙잡은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니노미야는 빗물이 들어갈까 사쿠라이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래. 여태까지 나에게 떨어지는 것 던져지는 것 흘러내리는 것 모두 그저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도무지 뭐라도 막아내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원하는 것은 순종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둘은 죄 젖은 채로 니노미야의 집으로 갔다. 사쿠라이는 두 달만에 찾은 곳이 그 사이에 어색해졌는지 쭈뼛대다가 먼저 냉큼 씻고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쳐내서 비를 다 맞게 한 장본인이 옷을 빌려주었다. 

“내일 출근이 아니라 다행인 거죠...”

“세탁비 줄게요. 미안.”

“그쪽이야말로 감기나 안 걸리게 해요. 몸이 재산이잖아.”

그날 사쿠라이는 그전의 시뻘건 팬티를 받아 입었다. 그냥 편의점 가서 사 올게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니노미야는 굳이 돈 쓰지 말라면서 만류했다. 새 거라고 했다. 새로 뜯은 거라고. 그전에 삿쨩이 사 준 거 먼저 입느라 남아 있던 거라고.

 

마중 나가 준다면서 밖으로 나온 니노미야는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사쿠라이는 어제와 옷은 달랐어도 신발은 그대로 구두 차림이었다. 역 근처까지 왔는데 니노미야가 갑자기 사쿠라이를 멈춰 세웠다.

“구두끈.”

“응?”

“풀렸어요. 묶어 주려고.”

“저도 어른인데요.”

“알아요 어른인 거. 어른도 구두끈 못 매는 사람 많아요.”

“저 구두 많이 신었어요.”

“자주 풀리는 거 척 보면 알아요.”

“그래서요?”

“묶어준다구요. 안 풀리게.”

니노미야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도로변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쿠라이의 구두끈을 사라락 풀어냈다. 투박한 손이 잽싸게 매듭을 지었다. 

어떻게 묶는지 어떻게 다른지라도 훔쳐보려고, 기억하려고, 그거 정도 뺏고 싶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왜 알려주지는 않고요?”

“안 풀릴걸요. 제가 묶어서.”

“풀리면 어떻게 묶어야 되는데요?”

“그때는요.”

저를 다시 찾아오세요. 또 묶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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