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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2. 10.
눈이 쌓인 산등성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푹푹 발이 빠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신발에 아이젠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몇 주 굳은 얼음에도 아이젠은 가히 폭력적으로 무심하게 갈퀴를 박아넣는다. 하아... 한숨을 쉬자 그것은 곧 입김으로 변했다. 입김은 곧 수증기로. 수증기는 금세 얼어붙어 무거운 물방울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얼굴에 방금 뱉은 입김이 변한 물방울이 들러붙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니노미야는 귀를 반쯤 덮고 있던 비니를 더 푹 당겨 써 귀 전체를 추위로부터 숨겼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자 시린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폐에 들어찬 공기가 또 물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가슴이 먹먹하게 무겁다. 자리를 잡고 무릎을 굽혀 앉은 뒤 들고 있던 샷건을 확인하고 총알을 집어넣었다.
이 근방에서 사슴이 가장 잘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길목이라고 하기엔 사람의 흔적이 없어 죄다 미끄러지기 십상인 산길이었지만 어찌됐든 길목이라고 니노미야는 생각했다. 저 멀리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는 사슴을 바라보았다. 사슴은 너무나도 가벼워 보였다. 다 자란 게 아닌 걸까? 하지만 모가지를 보면 충분히 자란 성체였다. 가벼워서 눈에 발자국도 남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사슴이 걸어온 길을 다시 바라보면 분명히 발자국은 있었다.
니노미야가 방아쇠를 당기고 천지를 울리듯 총소리가 났다. 사슴의 비명은 그 뒤였다. 사슴이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샷건을 옆에 내려두고 칼을 꺼내 필요한 부분만 해체해낸 니노미야는 눈에 칼을 대충 닦아내 다시 칼집에 집어넣고, 사슴의 고기를 집어넣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샷건의 안전장치를 다시 걸어놓은 뒤 발걸음을 돌렸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 길은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지금 가는 길보다 조금 더 많이 걸어야 해서 선호하지도 않았다. 남은 고기들, 사슴의 내장, 가죽, 대가리들은, 근방을 돌아다니던 늑대들이나 까마귀, 혹은 매들이 피냄새를 맡고 달려와 금세 뜯어먹어, 그것이 썩기도 전에 자취를 감출 것이다. 늘상 그렇게 해 왔다.
니노미야가 사냥하고, 본인 몫을 챙겨 가면, 나머지는 자연의 동물들이 해결해 주었다. 이 산에서 나고자라며 배운 것은 그것뿐이었다. 욕심을 부린다면 그 눈밭에 누워있는 건 사슴 따위가 아니고 니노미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 왔다.
오두막으로 돌아오면서 니노미야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불을 끄지 않고 나온 걸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들어갔지만 별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가져온 사슴고기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칼을 다시 씻어내고 샷건을 자리에 돌려둔 후, 가방을 털어 제자리에 걸어 둔 니노미야는 그제서야 허기가 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비에서 시작해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까지 마치는 데에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따져보면 참으로 경제적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먹을 것 구하기 제법 어려운 이곳에서 니노미야는 꽤 걸맞는 인재였다. 해가 뜨는 시간에 일어날 수 있었고, 필요할 때마다 사냥을 하러 나갈 수도 있었고, 그러나 사냥에 실패하더라도 굶주림에 시달려 힘들어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진 않아서 적당히 살아가는 게 가능했다.
포트에 물을 끓여 차를 한 잔 마시며 얼어붙은 손을 녹이고 있는데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 근방은 언제나 고요하기 때문에 그런 소음에는 익숙치 않았다. 민감하다면 민감할 정도로 반응했다. 허가받지 않은 밀렵꾼들이 종종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니노미야는 그들을 차갑게 되돌려보냈다.
"우리 집은 베이스캠프 아닙니다."
아이젠이 붙은 신발로 갈아신고, 장갑을 끼고 두툼한 점퍼를 입고, 혹시 모르니 권총을 하나 품에 넣은 채 니노미야는 손전등을 켜 문 밖으로 나갔다.
나와 보니 들리는 소음은 이 근방에 돌아다니는 떠돌이 들개의 짖는 소리 같다. 니노미야는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아 괜시리 긴장한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들개의 숨소리까지 들릴 법한 곳으로 다가갔다. 본 적 없는 개이기는 했지만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한 걸 보니 제법 먹지 못하고 지낸 것 같았다. 손전등으로 비춘 개의 주둥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니노미야는 크게 손짓해 개를 멀리 보냈다. 근처에 총을 한 발 쏴서 겁먹게 하자 굶주린 개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 뒤돌아 도망쳤다. 개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그것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옮기자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저작질을 한참 하지 못해 아직 턱힘이 부족했는지 개는 사람의 허벅지에 상처만 냈을 뿐 섭취는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벽돌색 파카를 입은 사람은 시체처럼 쓰러진 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힘없는 들개조차도 밀어내지 못하고. 니노미야는 무릎을 굽혀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으로 피가 솟아나고 있는 허벅지를 꽉 눌러 지혈한 뒤 그 끝을 당겨 묶었다. 제법 고통스러울 텐데도 역시 반응이 없었다. 약한 신음소리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갑을 벗고 손을 뻗어 모자 속에 집어넣은 뒤 잘 숨겨진 목을 만지자 불타는 듯 뜨거웠다. 대신 동맥은 아주 힘차게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저기요."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도 없는 것 같았다.
"걸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걷지 못했다. 니노미야는 남자를 부축해 오두막까지 끌고 들어왔다.
겨우 침대까지 운반한 뒤 점퍼를 벗어 다시 걸어둔 니노미야는 남자의 꼴을 보고 탄식했다. 꽤 떨어져 있는데도 니노미야가 서 있는 곳까지 할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둔다면 저 밖에 내버려 둔 것과 다를 바 없이 죽어갈 게 분명했다. 이미 찢어져 너덜너덜하게 허벅지에 들러붙어 있는 바지를 벗겨낼지 찢어낼지 잠시 고민하다가 양손을 모아 미안합니다, 라고 중얼거린 뒤 손수건을 풀러내고 남자의 바지를 벗겨내 바닥에 던졌다. 구급상자를 꺼내 와 허벅지의 피를 닦아내고, 뜯어먹히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지혈을 위해 힘을 세게 줘 붕대를 감았다.
침대를 양보하고 소파에서 잔 탓인지 어깨가 잔뜩 결렸다. 평소보다 제법 일찍 일어난 탓에 기지개를 켜며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나 싶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순간, 멱살을 잡혀 거꾸로 돌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이니 핼쓱한 얼굴의 남자가 니노미야 위에 올라탄 채로 니노미야를 한껏 눌러 침대 안으로 쑤셔박을 것처럼 힘을 주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껌뻑인 니노미야는 아무래도 남자가 착각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고 자유로운 손으로 멱살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런데도 남자는 꿈쩍하지 않고 니노미야를 쏘아보고 있었다.
"저기요. 죽어가던 거 살려줬는데... 누가 보면 내가 죽이려고 한 줄 알겠습니다."
"언제 발견했어?"
"어제 밤에요. 우리 집 앞에 있었잖아요."
"어제?"
남자는 혼란스러운 듯 니노미야를 누르고 있던 양 팔에 힘을 점점 풀었다. 그런데도 양 다리로 니노미야를 포박하고 있는 자세는 바꿀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허벅지가 눌렸는지 그제서야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허벅지를 내려다 보았다. 니노미야는 양팔을 위로 올려 결백하다는 자세를 했고 남자는 왠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입고 있는 바지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챘는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갑작스럽게 움직여서 그런 건지, 아직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지는 몰랐지만 남자가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니노미야는 그것에 놀라 자기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왜 갑자기 일어나고 그래요. 다쳐서 치료도 해 줬는데."
"아... 미안해요. 놀라서."
"네. 세수라도 하고 정신 차려요. 식사 준비할 테니까 괜찮아지면 나오세요."
남자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어 일으켜 침대에 다시 앉힌 니노미야는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켜 알려주고는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자 남자는 때맞춰 거실로 절뚝이며 걸어나왔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시끄럽게 들렸다.
"몸은 좀 괜찮아요? 어제 열이 엄청났는데."
"아. 지금은 괜찮습니다. 덕분에."
"음."
식사를 끝내고 니노미야가 말을 걸었는데 대화가 그곳에서 뚝 끊겼다. 괜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다가 니노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밖에 나가 볼래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자신의 파카를 찾았다. 다리가 불편하니 도와줄 요량으로 가까이 붙어 서 있었는데 남자는 왠지 익숙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움직였다. 야트막한 계단을 내려갈 때만 니노미야의 어깨를 빌렸는데, 그마저도 미안한 것처럼 눈썹을 한껏 가파르게 만든 상태였다.
어제 여기에 있었어요. 니노미야는 남자를 데리고 어제의 현장으로 향했다. 간밤에 눈도 오지 않고 웬일로 바람도 불지 않아 남자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먼저 발을 돌려 자리를 떴다. 니노미야는 남자를 뒤쫓아 가면서 왜 여기 왔는지 물었는데, 남자는 살짝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에 집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라고 묻자. 남자는 절뚝이면서도 니노미야보다 빨리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니노미야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기억났다.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종종 아버지를 찾아오던 그 사람. 그 사람 옆에 항상 붙어 있던 조그만 남자애. 감색 머플러를 한껏 둘러 얼굴 반쪽이 다 가려져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오로지 아버지와 니노미야를 바라보던 눈빛만은 기억했다. 아직도.
몇 년 전 갑작스레 홀연히 자취를 감춘 오노 사토시의...
제자라면 제자. 아들이라면 아들. 그러나 그 존재가 정확히 어떤 건지도 몰랐고 오노가 왜 그 남자애를 매번 살육의 현장에 데리고 다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니노미야, 오노와 남자애, 넷이서 사냥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뒤통수를 때려가며 번쩍번쩍 눈앞에 나타났다.
여태까지 오노의 곁에 바짝 붙어 있던 남자애는 자리를 잡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멀리 떨어져 나무 옆에 가만히 섰다. 니노미야는 아버지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오노를 돕지 않는 남자애가 이상하게 느껴져 그곳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남자애는 울고 있었다. 소리 하나 내지 않으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고 있었다. 왜 우는 거야? 니노미야는 당장 달려가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고 겨우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오노의 총구 끝을 바라보았다.
곰의 앞발에 난폭하게 복부를 찢겨가면서 아버지는 니노미야를 향해 소리쳤다. 도망쳐!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분명 저 멀리 서 있었던 남자애와 오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니노미야는 덜덜 떨리는 턱에 겨우 힘을 줘서 아빠! 라고 외쳤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성대까지 바짝 굳었다. 아버지는 총을 들어 곰의 턱에 갖다대면서. 니노미야를 돌아보고 살짝 웃어 주었다. 총소리와 함께 니노미야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대로 뒤돌아 오두막이 있는 곳까지 힘껏 달렸다. 기도가 불타는 듯 화끈거렸다. 집에 도착해 숨을 몰아쉬자 입에서는 피맛이 났다.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씨름하다 겨우 신고한 뒤 경찰이며 구급대원들이 올 때까지 니노미야는 오두막 앞의 야트막한 계단에 앉아 계속해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를 본 구급대원들이 모포를 둘러 주었는데도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듯 니노미야는 몸을 떨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두 사람 얘기를 했는데 경찰들은 주변에서 발자국이 끊겨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냥 중의 사고사. 니노미야는 그날부로 천애고아. 뼛가루를 가져와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오면서 니노미야는 다짐했다.
그 남자애를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겠다고. 그때, 왜 울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버린 건지...
남자는 그 기억을 떠올려낸 니노미야가 그곳에 장승처럼 붙박혀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다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짧은 계단을 다시 올라가는 동안 니노미야가 없어 꽤 애먹었지만 어떻게든 다시 그곳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파카를 벗어 걸어두었다. 다치자마자 너무 활동적으로 굴었는지 피가 돌아 머리에 열이 차는 기분이 든다.
니노미야는 한참을 그곳에 가만히 서 있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발걸음을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움직여서, 니노미야가 문고리를 잡을 때쯤엔 한참 내린 눈이 이미 남자의 핏자국을 다 덮어버렸을 것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니노미야가 문을 열고 돌아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니노미야를 돌아보았다. 왜 이제 돌아왔냐는 표정이었는데 니노미야는 갑작스레 열이 채서 그걸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성큼성큼 단숨에 남자 앞으로 걸어간 니노미야가 왠지 모르게 화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남자의 팔뚝을 확 낚아채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남자는 니노미야가 이끄는 대로 방에 끌려들어갔다. 저기, 저기... 남자는 니노미야를 계속 불러 세웠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침대 위에 내던져진 남자는 니노미야를 올려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갑자기. 뭐 때문에요?"
"왜 돌아왔어...?"
"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고... 왜 돌아왔냐고 묻잖아."
"뭐를..."
"너. 그때 그녀석이지. 오노 사토시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애새끼. 우리 아버지 죽을 때. 나몰라라 도망쳐서 목숨 간수한 새끼들. 너지. 멀리서 한참을 울었잖아. 나. 다 기억해. 나 하나도 잊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니노미야는 왼손을 뻗어 남자의 허벅지를 꾹 누르기 시작했다. 붕대가 감겨 있는 남자의 오른쪽 허벅지를 계속해서. 남자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처가 점점 벌어져 붕대 위로 피가 샜다. 그게 넘쳐서 바지까지도 짙게 물들 지경이 됐는데도 니노미야는 손을 떼지 않았다.
"왜? 왜 도망쳤어? 왜 돌아왔어? 우리 아버지는 곰 같은 거 사냥 안 해. 그런데 그날은 그자식이 가자고 해서 간 거잖아. 그렇지? 넌 다 알지? 다 들었지? 그자식 옆에서."
"읏..."
"왜? 말을 못하겠어? 어떻게 하면 말할 수 있겠어?"
"마... 말해 줄 테니까, 말할 테니까, 손... 손 좀..."
"어디서부터?"
"아, 악... 앗, 저기, 저, 아아, 제발 손, 아파요, 저기요..."
벌벌 떨리는 양손으로 남자는 자신의 상처난 허벅지를 있는 힘껏 누르고 있는 니노미야의 팔을 붙들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니노미야의 손은 벌개지다 못해 이젠 하얗게 될 정도로 세게 힘을 주고 있었다. 남자는 이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뻐끔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니노미야를 말리는 손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 왜 울었어?"
"응...?"
"같이 사냥 나간 날.. 넌 멀리서 울기만 했잖아. 들킬까 봐 소리도 안 내고 계속. 근데 나, 다 보고 있었어. 그때부터 계속 물어보려고 했어. 다시 만나면. 왜 울었어? 뭐가 슬펐어? 무서웠어?"
"카, 카즈나리, 카즈나리 군 맞지?"
"응..."
"다행이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얼굴 보니까 생각났어... 윽..."
"뭐를? 이름? 아니면..."
"화났어? 내가 돌아와서..."
이름이 불리자 니노미야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풀었다. 남자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지만 압박하던 힘은 서서히 사라졌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아까부터 추운 듯 덜덜 떨면서, 남자는 니노미야에게 화났냐고 물었다. 전혀 화나지 않았어.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 카즈나리 군..."
"뭐가...?"
"그날 나가자고 한 거... 전부. 도망친 것도."
"잘 아네."
"여기 다시 와서 화났어?"
"아니..."
"말하고 싶어서... 그런데 도무지 이곳을 찾을 수가 없었어. 용서해줘. 사토시에게 계속 캐물었는데도 말해 주지 않았어. 나 혼자서는 찾아올 수가 없어서 꼭 도움받아야 했는데... 그렇게 사라지기 전까지도 말을 안 해 줘서. 미안해. 일찍 오지 못해서. 엊그제 겨우 알아냈단 말이야. 그래서..."
"길을 잃었어?"
남자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다 토해내지 못한 말이 있는 듯 목울대가 움직였지만 니노미야는 사정 같은 건 봐주고 싶지가 않았다. 양 다리 사이에 포박된 자세 그대로, 남자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누운 채로 불편하게, 니노미야를 흘긋대며 올려다보았다.
그때처럼 울고 있었다. 말없이 조용하게 눈물을 흘리던 그 남자애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답지 않게 그 모습을 보자 허기가 졌다. 니노미야는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입맞췄다. 남자는 떨고 있던 몸을 멈추고 바짝 굳었다. 사탕이라도 빨듯 남자의 혀를 빨아올리다가, 고깃덩이라도 씹듯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니노미야는 쉴새없이 입을 움직였다. 남자의 앞턱을 씹어 자국을 냈다. 땀에 잔뜩 절어 갈아입혀 준 티셔츠를 벗겨냈다. 남자는 그쯤 되자 니노미야를 말리고 싶었는지 어깨에 손을 가져다댔는데, 동시에 니노미야가 왼손으로 다시 상처입은 허벅지를 누르자 작게 소리지른 뒤 니노미야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건 그때 왜 울고 있었는지. 그것뿐이었는데. 왜 도망쳤는지는 물어보고 싶지 않았어. 나도 도망쳤으니까. 나도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도망쳤잖아. 다음엔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고 싶었어. 왜냐하면 살아 있는지가 궁금해서. 살아 있어야지만 물어볼 수가 있잖아. 왜 울고 있었는지...
바지를 벗겨내자 이미 잔뜩 피가 새어나와 질척질척해진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일부러 그쪽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니노미야는 손바닥에 침을 퉤 뱉은 뒤 구멍에 문질렀다. 제법 폭력적으로 성기를 쑤셔넣었다. 남자의 가슴팍을 세게 누르자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니노미야는 허리를 움직이면서. 제발 소리라도 지르라고 속삭였다.
"카, 카즈나리, 군... 앗, 아아, 아파, 아프니까,"
"얼마나?"
"그만... 미안해, 미안, 누르지 말아 줘, 읏, 악!"
아까부터 구멍을 쑤시는 힘과 비슷한 정도로 계속해서 상처를 짓누르는 니노미야에게 남자는 그렇게 부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니노미야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왠지 괘씸해서. 왠지... 계속해서 남자가 미안하다고 외치는 소리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가 않아서.
아까 전 하지 못해 삼킨 말이 넘어간 목덜미를 니노미야가 물어뜯는 것처럼 이를 대고 있는 지경이 되자 남자는 이제 입을 다물었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이제 니노미야에게 사과를 비는 것도 무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아아.. 들개에게.. 들개에게 뜯어먹히고 있다. 그때 차마 먹히지 못한 만큼 지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차마 카즈나리군의 아버지까지 데리고 사냥에 나선 것도, 왠지 직감했음에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것도, 오노와 둘이서만 훌쩍 도망쳐버린 것도, 그래서 둘 중 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고, 카즈나리군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게 너무 죄스러워서...
니노미야가 처음 남자를 구조해 침대 위에 던져놨을 때처럼 남자는 이제 할딱대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숨이 차는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 뒤 사토시를 계속 닦달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라도 보러 가자고. 같이 가기 싫으면 나라도 갈 테니 데려다 달라고. 그것도 싫으면 길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그런데 사토시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묵살하고 하던 일을 했다. 악지르며 떼를 써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죽었으면? 울분에 받쳐 울다가 그런 소리를 내뱉었는데 그때 자신을 돌아본 사토시의 얼굴. 그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이 싸늘한 야차 같은 얼굴이었다. 그럴 일 없어. 그렇게 대꾸했지만 그 뒤에는 왠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입을 다물었다. 만약 사토시가 죽었으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말도 그저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 가면서 그곳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도 점점 줄여나갔다.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해도 사토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도대체 왜 말해 주지 않느냐고 되려 화를 냈는데 그것도 본 척 하지 않았다. 오기가 들어 절대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짐을 챙겨 나섰다. 같이 가자는 말도 하지 않고.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대답해 주지도 않았다. 잘 있으라는 말만 건네고 사토시는 사라졌다. 둘의 집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편지 한 통. 보낸 곳도 보낸 사람 이름도 없이 날아온 편지에는 간단한 약도와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무 설명이 없었는데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껏 계속 알려달라고 졸랐던 그곳이었다.
발걸음을 떼자 한 발 한 발이 모래주머니라도 묶인 듯 천근만근이었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 와 보니 제법 가파른 산길뿐이었다. 흐릿한 기억과 간단한 약도에 의존해 길을 찾기에는 똑같은 나무들이 눈에 휩싸여 있는 곳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 근방에 집이라고는 그 오두막뿐이니 불빛이라도 따라가면 될 거야, 라는 생각으로 발을 움직이기를 한참. 벌써 해가 떨어졌는데 근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서 늑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무서워 발걸음을 재촉하다 미끄러져 굴러떨어졌다. 양팔을 모아 머리를 감싸안고 구르다 나무에 걸려 가까스로 멈춰설 수 있었다. 그동안 멈췄던 숨을 토해냈다. 어디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았는데 도무지 팔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다가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헥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들개가 눈앞에 있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자세히 보자 바짝 말라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들개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혀를 내밀어 내 볼을 핥았다. 한참을 핥다가 들개는 파카를 긁어 구멍을 내려다가 힘이 부족해 실패하고, 그나마 살갗에 제일 가까운 허벅지에 이를 박아넣었다. 악 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바지를 뚫고 다가온 들개의 송곳니를 느끼는 순간 총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들개는 자기도 모르게 깽 하는 소리를 냈다.
난 총알이 날아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손전등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그 사람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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