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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19.
저녁 메뉴를 뭘로 할까. 매일매일의 고민. 누군가 차려주는 집밥을 먹은 지도 벌써 꽤 오래 지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녁 메뉴의 고민은 점심 도시락 뚜껑을 열 때부터 시작하는 법. 요즘은 레토르트도 제법 사람의 손길이 듬뿍 들어간 척하는 제품들이 쏟아져 나온다지만 그런 것들에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 한끼 대충 때우고 말면 되지, 하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끼니를 거른다면 몰라도 시간도 있고 여유도 있는데 굳이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서.
물론 피자나 햄버거 따위의 패스트푸드가 먹고 싶은 날도 있다. 역시 고등학생이긴 한가 보지? 가끔 누나네 집에 놀러갈 때 그런 걸 사 들고 가면 누나에게 꼭 그런 말을 들었다. 딱히 부정도 못 하겠어서 그냥 피자를 한 입 더 먹고는 했는데, 주변 친구들을 보면 고등학생이 혹시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종족으로 변모하는 걸까, 같은 생각도 한 적 있다. 그렇게 많이 먹는 편도 아닌데 그들과 비슷한 식비를 쓰는 것에 불만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때로는 불만이 솟기도 했다.
그러나 메뉴 고민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발길은 마트로 향하고 있었다. 반대로, 요리하는 것에 흥미가 있는 쪽이 자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훨씬 나았다. 이런 얘기를 담임 선생님에게 했을 때, 진로를 그 방향에서 찾아보는 게 어떻냐는 말도 들었지만,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반대로 들었다. 애초에 혼자 해 먹는 것에 불과하니까 누군가의 반응을 봐 본 적도 없고.
집에 계란이... 몇 개 있더라. 오므라이스를 할까 했다. 장을 다 보고 괜히 마트를 한 바퀴 돌았는데 오늘따라 아이스크림이 눈에 자꾸 들었다. 결국 한 바퀴 더 마트를 구경하고 나서야 아이스크림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가방 안에서 접어 뒀던 장바구니를 꺼내자 캐셔는 익숙하게 포인트 적립을 물었다. 전화번호 뒷자리를 말하고 장바구니를 채웠다. 포인트, 얼마나 있어요? 지금 438점요.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왕 산 거, 빨리 냉동실에 넣어 두고 싶었는데, 집 앞에 도착해 보니 가방 앞 왼쪽 주머니에 늘 넣어 두는 집 열쇠가 없었다. 지갑도 다시 열어 보고 셔츠 앞주머니,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가며 전부 뒤지고, 쪼그려 앉아서 가방을 뒤집어 엎었는데도 없었다. 다시 가방을 정리하다가 부활동 전에 서랍에 넣어 뒀던 게 생각났다. 시계를 보니 지금은 학교에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느끼면서, 난감해진 채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를 켰다.
“누나.”
- “응?”
“나 학교에 열쇠 놓고 왔어... 스페어키 좀.”
- “어쩐지. 갑자기 웬 전화인가 했다. 미안한데 야근 중이라. 형부는 출장 가서 지금 집에 아무도 없는데 어떡하냐?”
“아, 그래?”
- “이제 끊는다? 나 이거 오늘까지 해야 되는 거라서 집에 갈 수가 없어!”
“그래 끊어... 수고해.”
전화를 끊고 나니 허망했다. 저녁 메뉴를 생각하는 데에 정신을 너무 집중해버려서 열쇠를 놓고 온 것도 몰랐으니 남탓을 할 수도 없고. 복도 난간에 기대 섰다. 바닥에 내려 놓은 장바구니가 괜히 처량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작게 말소리가 들렸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 밑까지 바짝 걷은 남자가 휴대전화를 어깨와 얼굴 사이에 낀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남자도 나를 바라봤다. 통화하는 목소리를 살짝 죽이긴 했지만 장바구니를 발치에 두고 집에 안 들어가고 있는 나를 좀 이상하게 바라본 남자는 내 집보다 한 칸 안쪽, 그러니 딱 내 옆집의 문에 열쇠를 꽂아넣었다.
응, 나 지금 도착, 오늘 좀 일찍 끝나서... 응, 너 언제 오는데? 열 시에 퇴근? 그럼 집에 오면은? 저녁은? 그렇게 먹고 일이 되냐.. 집에 와서 먹는다고? 나, 아무것도 준비 못 해줘. 야, 집 태울 일 있어...
남자는 아직도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들고 있던 가방만 내려뒀는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셔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복도 제일 끝으로 가서 난간 밑에 누군가 뒀다고 생각했던 재떨이를 들어 난간 위에 올렸다. 저거, 누가 둔 건가 했더니 옆집인가. 불을 붙인 남자는 난간 밖을 멀리 바라보며 통화를 계속했다. 내용을 듣다 보니 같이 사는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 같았는데, 순간 옆집에 누군가 산다는 건 알았지만 두 사람 이상이 산다는 느낌은 받은 적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기다리지, 뭐. 할일 하고 있으면 되잖아. 응. 아니, 니가 빨리 오면, 그래, 그러면 되잖아, 얏. 야. 응? 응... 올 때 연락하고, 네에, 돈 많이 벌어 오세요, 니가 많이 벌어서, 나 먹여살려, 싫어? 싫어? 인마, 너...
웃으면서 전화를 끊은 남자는 담배를 몇 모금 더 빨아들이더니 재떨이에 비벼 끄고 원래 있던 난간 밑으로 되돌려뒀다. 아, 역시 좀 아닌 것 같은데. 망설임이 자꾸 새치기를 하려고 했지만 이제 아예 완전히 녹아버렸을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저어... 저기요.”
“네?”
“아, 저, 다른 게 아니고, 저 옆집인데요, 저 오늘 열쇠를 놓고 와서 지금 집에 못 들어가는데... 오늘 하루만 재워주실 수 있을까요?”
“옆집? 학생? ”
“네. 혼자 살아서... 지금 아이스크림도 다 녹고......”
마지막 말까지는 덧붙일 필요가 없었나, 싶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뜬금없는 말을 해서 아까보다도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려나, 싶어서, 숙였던 고개를 약간 들었는데 예상과 다르게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래요?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서 하루만 재워 달라고?”
“아니, 그런 게 아니, 아닌데...”
“아니, 괜찮아요. 아까는 솔직히 처음 본 사람인 줄 알고 그랬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아침에 몇 번 마주친 것 같아서. 들어와요. 아이스크림 다시 얼려야지.”
남자는 넉살 좋게 웃으며 문을 더 크게 열었다. 장바구니가 들어갈 정도로 넓게 문을 잡아 주면서 어쩐지 계속 킥킥 웃고 있었다. 가방과 장바구니를 꽉 움켜쥐고, 실례합니다, 라고 하면서 남자의 현관에 불쑥 들어섰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응?”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모르겠어서. 전 그냥 학생이라고만 부르셔도 되는데요.”
염치를 무릅쓰고 다 녹은 아이스크림까지 냉동고에 다 집어넣고 그렇게 물었다.
“그건 너무 정없지 않나? 학생 먼저 이름 알려 주면 나도 알려 줄게.”
“마츠모토 준이요. 그냥 마츠모토라고...”
“오, 좋은 이름. 난 사쿠라이 쇼. 명함으로 줄까? 어려운 이름은 아니라... 괜찮지? 뭐, 나도 원하는 대로 불러도 돼. 나는 뭐라고 부를까...”
“그냥 마츠모토로...”
“준군으로 괜찮지? 내 집에서 자고 가니까.”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듯 마는 듯하며 뒤통수를 문질렀다. 그러다가 또 괜히,
“그럼 저는 쇼상, 이라고 할게요.”
라고 했다. 남자는 눈까지 꼭 마주치며 그렇게 대답하는 내가 마음에라도 들었는지 소파에 앉은 채 크게 웃었다. 저렇게 웃으면 옆집까지 들릴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파 옆에 같이 앉기까지는 좀 그래서 식탁 의자를 하나 끌어내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저녁 준비를 하고, 그렇다면 벌써 식사는 끝내고 설거지나 하고 있을 때쯤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졌다.
“저녁 드셨어요?”
“아니, 아직. 혹시 방금 그거, 저녁 재료?”
“네. 저, 오므라이스 하려고 했는데요... 재워 주시는 것도 있고 여러모로 폐를 끼쳤으니까. 두 명 분 하면, 드실래요?”
“요리하는 학생, 우리 집 애 말고는 처음 봐. 보통 그 나이는 다 부모님이 해 주는 거 먹고 그러지 않나? 해 주면 먹지. 뭔가 요리 잘할 것 같고, 궁금해서. 숙박비 대신으로.”
우리집 애? 요리를 할 정도로 큰 애가 있어 보이진 않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먼저 밥솥을 열었다.
칼질을 하는데 뭔가 어색했다. 이 부엌이 어쩐지 낯설다. 칼은 무서울 정도로 잘 갈려 있는데 기본적으로 자주 쓰는 것 같지는 않은 조리 도구들이 잔뜩 있고, 무엇보다 아까 전부터 자꾸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집주인을 여기 세워 놓는다고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았다.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기도 전에 남자는 미리 와서 앉아 있었다. 어쩐지 음식을 시연하러 오기라도 한 것처럼 머쓱해져서 고개를 괜히 또 숙였다. 동시에, 순전히 먹어 본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 그 맛,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서 얼마 안 지나고 고개를 슬금 들었다.
남자는 첫입부터 맛있게 먹어주었다. 먹어주었다? 보다 못해 잔에 물을 따라 주면서 천천히 드시라고 했다. 근데 진짜 맛있어! 조리학교 그런 거 다니는 거야?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남자는 물었다. 고개를 젓고 하복 셔츠의 학교 와펜을 가리켰다. 여기요. 그냥 평범한 인문계. 아하. 앗. 의미 모를 단말마까지 덧붙인 남자는 싱크대로 갔다.
“설거지 할 거니까.”
“네? 네.”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 한 개지?”
“네. 한 개인데... 사올까요, 더?”
“됐어. 뭐 그렇게까지... 정 먹고 싶어지면 이따 사 오라고 하면 되니까.”
그 뒤로 남자는 말이 없었다. 아까 등장했던 ‘우리집 애’랑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할 사람’은 같은 사람일까. 설거지가 끝나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쓰레기를 버렸다. 싱크대의 물을 닦아내고 남자가 뒤돌자 그제야 먼저 씻어도 되냐고 물었지만, 어차피 가지고 있는 생필품 같은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생각났다.
그 난감한 표정을 알아챘는지 남자는 또 아까처럼 웃었다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새 칫솔과 생활감 있는 옷들을 꺼내왔다. 속옷 정도는? 하루쯤은 괜찮아요... 아침에 갈아입었어서. 그런 할 필요 없는 말까지 꺼내버리고는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남자는 테이블에서 서류 따위를 읽고 있다가 내가 나온 걸 알아채나 그럼 이제 내 차례, 라고 하면서 일어섰다. 스쳐지나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 편하게 써도 된다는 얘기나 하면서, 쏙 들어가 버렸다. 남의 집을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쓸 수가 있는데요... 라고 생각하면서 목석처럼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가방을 열었다. 안경이랑 문제집. 숙제라도 있어서 다행인가.
집중하느라 남자가 눈앞에 앉은 것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쩐지 얼굴이 뜨끔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웃었다.
“고개 그렇게 푹 숙이니까 눈 나빠진 거 아니야?”
“아... 가족력이에요. 아버지도 누나도 다 나쁘고.”
“아하. 그래도 자세 바르게 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근데 아까는 안경, 안 쓰고 있었지?”
“네. 생활할 때는 안 쓰고 공부할 때만... 잘 안 보이면 역시 불편하니까.”
“나 잠깐만.”
안경을 보여 달라는 손짓에 어쩔 수 없이 벗어서 건넸다. 약간 붉은색을 띄는 검은 뿔테. 남자는 안경을 눈앞 가까이에 가져다댔다가 어지러운지 금방 떨어트렸다.
“제법 나쁘네.”
“나빠요, 많이.”
“콘택트렌즈 같은 것도 써?”
“뭐 가끔... 놀러가거나 할 때요.”
“잘생겨서 안경도 잘 어울려. 그냥 계속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불편해서 그런 거지?”
“아, 쓰는 건 별로 안 불편한데... 생활할 때 잘 보이는 게 오히려 불편하고.”
“오. 더러운 거 같은?”
“네. 그래서 청소할 때...도 쓰고.”
쓸데없다, 라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누군가 안경 얘기에 이렇게 흥미를 가져 준 건 처음이라 사족에 사족을 자꾸만 붙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안경을 맞추러 가서, 너도 어쩔 수 없는 마츠모토인 거다, 라는 말을 했던 것 이래로.
그때 문에 열쇠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그 열쇠의 주인이 복도에서 남자가 통화하던 상대라는 걸 알았지만, 정작 남자는 그 소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오, 수고했어. 진짜 일찍 왔네? 혹시 뛰어 왔어?”
“아니, 그냥... 뭘 뛰어 와. 근데, 누구?”
“아, 옆집 학생. 집 열쇠 없다고 하루만 재워 달라고 해서.”
신발을 벗으면서 날 뚫어져라 쳐다본 그 사람은 남자의 말을 듣고 뒤이어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불쾌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껄끄러운가 싶어서 등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교복이 똑같았다. 안경을 벗고 있었어서 얼굴이 잘 안 보였는데, 가까이 오니까 왠지 생긴 게 익숙했다. 한번에 알아볼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두세 번 머리를 굴려야 떠올릴 수 있는...
“오늘도 마셔?”
“괜찮잖아. 일찍 퇴근했고.”
“뭐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지만. 밥은?”
“아, 미안! 연락 못 했다. 준군이 해 줘서 미리 먹었어.”
“준?”
“니노미야?”
“어? 서로 아는 사이?”
생각났다. 입학식 때 신발장에서 길을 물어봤었다. 1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다. 공교롭게 2학년 때도 반이 같았다. 그것뿐. 3학년인 지금은 반조차도 달랐고 공통의 친구도 없고 하굣길이 같지도 않고... 애초에 니노미야는 부활동 같은 걸 안 했으니까.
“누구... 아. 마츠모토네 준?”
“뭐야, 그 호칭은...”
“같은 반이었었어. 작년이랑 재작년.”
“그정도면 친구지.”
“아니, 별로 안 친하다니까. 나 씻는다.”
니노미야는 가방을 던져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괜히 머쓱해져서 안경을 받아들고 집어넣었다. 저 소파에서 잘게요. 응 이불 필요해? 아니요 더위타서. 남자는 다 마신 캔을 정리하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물었다. 체면을 차리는 게 아니고 정말로 더워서 그랬다. 정 필요하면 이거.. 쓸게요. 소파 어딘가에 있던 담요를 가리켰다.
불을 다 끄고 침실에 들어간 남자는 마지막으로 잘 자라고 하면서 아침에 깨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려다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씻고 있는 니노미야 탓에 욕실에서 물소리가 계속 들렸다. 누워서 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갑자기 수전이 잠기며 턱 하고 물이 끊기자 문득 니노미야가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의 집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니 사는 집이겠지만, 일단 성도 다르고...... 그렇다면 모계쪽 사촌인가 싶었는데 그런 것 같진 않았고... 남의 집이라 영 잠이 안 왔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소파, 쇼상이 침실이면 니노미야는 어디에서 자는 거지, 이런 게 궁금했는데...
니노미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들어갔다. 말소리가 작게 덜 닫힌 문 밖으로 흘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방문 앞에 다가섰다. 뭔가를 물어보려거나 문을 벌컥 열거나 그러려는 건 아니었다. 말소리가 신경쓰였다. 잠도 안 오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가 도무지 신경 쓰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남의 내밀한 대화를 훔쳐 듣는 취미 따위는 없다. 그건 다 니노미야의 태도가 껄쩍지근해서......
왜?
하고 싶어...
밖에 친구 있잖아.
무슨 상관? 다 컸는데.
아니, 너 참...
근데 아까 전화할 때 말야. 돈 많이 벌어오세요, 그거 귀여웠는데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돼?
너, 그런 거 시키면서 손이 어디로... 야.
응? 아니,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돈 많이 벌어오세요, 얼른.
야... 앗. 진짜로, 잠깐, 너어......
귀여웠다니까 안 해 주네.
응...
문앞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데 점점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발바닥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는 목소리는 오히려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심장 뛰는 소리에 대화 소리가 점점 작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니노미야가 이 집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온 이유... 열쇠를 가지고 있던 이유. 니노미야와 남자가 했던 통화 내용들. 나를 순간 없는 사람처럼 만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방금 전의 대화. 같이 살면서도 방이 나뉘어 있지 않은 이유......
니노, 너, 어...
왜?
말해달라며? 키스하는데 말을 어떻게 하냐. 너 참 이상해, 그거 고쳐야 되는,
뭘 또 고쳐. 이렇게 태어났는데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됐다. 돈 많~ 이 벌어 오세요?
아까랑 좀 다른데, 이거는? 응?
잠깐... 걸리적거려.
응. 벗겨 줄게.
됐어. 내가 너보다 어른이거든. 혼자 할 수 있네요.
아니, 지금은 어른이고 그런 것보다...
됐어됐어.
헉. 하... 아니, 앗, 아, 저번에도 말했지, 와아, 그렇게 잡, 잡지 말라니까, 아니 같은 남자끼리면서 왜 그러는 거야.
괘씸해서. 왜? 싫어? 만지지 마? 그냥 손도 대지 말고 빨아 주지도 말고?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 근데 지금 손은 댔으니까 입으로 해 줄 생각 있는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이불끼리 부딪히는 부스럭대는 소리가 한참 이어지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젖은 소리들로 바뀌어 있었다. 갈수록 말은 줄어들고 입맞추는 듯한 소리들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폈더니 손톱 자국이 나 있는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방울져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래 연인 사이였다는 거지...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알았던 학급 친구와 옆집 남자가. 나는 하루 재워 주기만을 부탁한 옆집 남자의 집에서 그 친구와 집주인의 침대 사정을 훔쳐보고 있다... 어쩐지 갑자기 현실감이 없어졌다. 이 집 말고 다른 집에 재워 달라고 할걸. 다른 사람 집으로 갈걸. 차라리 마트 직원 아이바군한테 부탁해서 아이스크림만 다시 얼려 놓고, 그 사람한테 하루만 재워달라고 할걸. 그 사람, 분명히 지금은 여친 없으니까. 아니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열쇠 있는지 확인할걸. 남의 집 침실 앞에서 기척을 죽이고 가만히 서서는 삼라만상이 머리를 막 헤집어놓고 가는 기분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젠 자는 척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잠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아주 조금 열린 문 틈 사이로
이쪽을 보고 있는 니노미야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 사이로 조금 보이는 주제에 눈빛이 너무 강해서 어쩐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라는 듯 턱짓했는데 나는 순간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면서도 혹시 남자마저 내가 여기 서 있는 걸 알고 있었을까 생각하자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고작 5센치 남짓 열린 문틈 때문에 그 앞에 서서 너무 긴장했다. 소파에 눕자 오한이 드는 듯했다. 모로 누워 담요를 덮었다.
내가 조용해지자, 아니 나는 원래 조용히 있었지만, 침실에서 들리는 소리는 점점 잘 들리는 듯했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그렇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리의 내용을 알게 되어서 그럴 수도 있는 거고. 침대가 썩 고급은 아닌지 가끔 참다 못해 침대가 끼걱이는 소리까지 튀어나왔다.
바지춤이 무거워졌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소리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여기서 자위까지 하는 추태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아무도 보지는 않을 테지만. 속으로 구구단이나 외우며 심호흡을 깊게 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저 정말 그런... 저를 정말 그런 관음증의 변태로 만드실 생각은...
침실 문이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벌컥 열렸다. 누군가 턱턱 걸어나와 물을 마시는 소리도 뒤이어 들렸다. 쇼상? 니노미야? 누군지 몰라서 오히려 더 긴장했다.
“야.”
니노미야였다. 내가 아직 안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라면 일어나라는 뜻이었는지, 소파 앞에 서서 니노미야는 나를 불렀다. 모른 척하려다가, 아까 문틈으로 마주쳤던 니노미야의 눈이 자꾸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니노미야가 시키는 대로 일어섰다. 내가 긴장한 듯 보이자 니노미야가 픽 웃었다. 나는 지금 앞으로의 성벽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중대한 사건을 겪었다고, 라고 말하려다가 그게 더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잠깐 나와...”
아르바이트하고 돌아왔다고 했었던 게 그 졸린 목소리를 들으니까 기억났다. 따라 나가며 시계를 한 번 봤는데 거의 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을 체감하자 나도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듯했다.
여름이라 이 새벽에 밖에 나와도 시원하지 않았다. 여전히 습고 덥한 날씨에 니노미야는 앞 난간에 팔꿈치를 올려 기대고 아까 남자와 똑같은 담배를... 담배?
“어.”
“왜?”
“담배?”
“뭐 괜찮아. 내가 사는 것도 아니고.”
“아...”
니노미야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아직도 한 발짝이나 넘게 멀리 서 있었다.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니노미야는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이리 와 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아, 절대 갑을 관계 그런 게 아닌데도, 나는 거절하지를 못하고 슬그머니 그 옆에 가서 섰다.
“긴장했어?”
“뭐 조금...”
“그럴 필요 없어. 뭐 보라고까지는 아니지만 들으라고 열어둔 건 맞으니까. ”
“응... 뭐?”
“간이 크네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네?”
“무슨 소리...”
나는 니노미야가 하는 말을 졸린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상한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바짝 가까이 다가갔다.
니노미야가 내 턱을 붙잡았다. 나에게 키스했다. 담배 냄새가 났다... 아까 복도에서 똑같은 담배를 피우던 쇼상과 똑같은 냄새... 당황해서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청포도향이 났다. 니노미야에게서.
“너 그 사람한테 뭔가 반했다든가... 그런 거지? 어때?”
“뭐... 뭐가 어때.”
“간접키스잖아. 나, 방금 전까지 쇼쨩이랑 섹스했으니까.”
새벽 두 시 복도에서 아무도 들을 리 없고 볼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듯이 하며 니노미야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무슨 그런 말을 이런 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고등학생이 담배나 피우면서, 너 이렇게 이상한 애인 줄 몰랐다, 라고 했다.
니노미야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쪽 손으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내가 얼굴을 한참 찌푸리고 쳐다보자 니노미야는 눈썹을 크게 으쓱였다. 그제야 내가 아직까지도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니노미야의 입을 막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우와. 죽이는 줄 알았어.”
“아니, 누군가 들을지도 모르고...”
“됐어. 이 시간에 누가 들어.”
재가 떨어질락말락하는 담배를 느긋히 재떨이에 가져다대고 털어낸 니노미야는 난간에 등을 기대는 자세로 서서 졸린 듯 반밖에 뜨지 않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씩 웃었다.
“나 말이야,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는 누구를 싫어하고, 그런 거 엄청 잘 알거든. 다들 모르겠지만. 가끔 마니또 같은 거 할 때, 내가 모른 척 이어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말이야. 마츠모토.”
“어?”
“나 알아, 너 그 사람이 마음에 드는 거.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엔, 이렇게 한번 물꼬 트면, 쇼쨩 그 사람, 엄청 친한 척하거든. 그런 식으로 계속 만나고 하다 보면, 너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먼저 그런 식으로 당해서.”
아니, 오늘 처음 제대로 말했고, 처음엔 그 사람,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엄청 차갑게 쳐다봤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니노미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 이 집에서 돈 벌어오는 가장, 식모, 애인, 뭐, 애견, 그런 것들 하고 있거든.”
그런 터무니없이 들리는 말을 하면서 니노미야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었다.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건 나니까. 그 사람을. 그러니까... 너, 늦은 거라고 말해 주려고.”
그럼 방금 전의 5센치의 문틈, 니노미야가 일부러, 나한테 마운팅을 취하려고 한 짓이 분명했다. 나는 나를 그정도로 얕봤다는 생각에 갑자기 열이 치밀었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의도가 있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늦었다고 기회가 없는 건 아쉽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어?”
“만약에 쇼쨩이랑 키스하고 싶으면 나 찾아오라고. 아무 일 없이 옆집 문 두드리기는 머쓱하잖아? 나야 이유 없어도 학교에서 찾으면 되고.”
“아니, 무슨 말?”
“쇼쨩이랑 키스하고 싶으면, 내가 해 줄게. 방금처럼. 난 쇼쨩이랑 키스하니까, 나랑 키스하면 넌 쇼쨩이랑 간접키스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게...”
싫으면 말라는 듯 니노미야는 재떨이를 다시 아까 쇼상이 내려뒀던 그 자리에 그대로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난 나를 복도에 내버려두고 먼저 들어가려는 니노미야의 뒤통수를 멍하니 보다가, 나도 모르게 쏙 빠져나가는 팔을 확 붙잡아 당겨버렸다. 그 탓에 니노미야가 닫히던 문에 살짝 부딪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 ...몇 반인데.”
“D반. 뒷문 앞자리니까 누구 안 불러도 되고 들어와서 나한테만 말 걸면 돼. 편하지?”
“그런, 그런 거 한다고 말한 적 없어!”
“쉿. 이제 깰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 그런 이상한 건...”
“그래,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잊어버리는 것도 니 자유야. 그런데 말이야... 못 잊을걸. 장담할게. 그러니까 언제 오든지 상관없어. 대신 방과후는 제외. 나, 일하러 가니까.”
“무슨 일?”
“어떤 아저씨가 나한테 가게 물려주고 싶다고 해서.. 회 썰러.”
거래 성립이다, 그럼, 하며 니노미야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내 손을 떨쳐내고 하품을 크게 하며 침실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침대에 누워 분명 그 남자를 꼭 끌어안을 거다. 선풍기 방향을 그쪽으로 돌려줄 거다. 잠깐 깬 것 같으면, 화장실이나 다녀왔다고 하면서 남자를 달래 재울 거다.
거기까지 생각해버린 나 자신이 스스로 징그러웠지만, 이런 경우, 니노미야의 제안이 훨씬 이상하다.
아, 어쩐지 이상했던 부엌, 이젠 왜인지 알았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오른손으로 써 버렸지만, 그 칼, 왼손잡이용이었다.
사쿠라이 씨는, 오른손에 버릇 있게 펜을 쥐어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분명히 굳은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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