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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에서 바람맞은 남자란 얼마나 처량한가.
“전화도 안 받고 말야...”
벤치에 앉아서 전화를 끊는다. 사서함으로 가기 전에. 그 찰나에 아주 잠시 고민했다. 뭐라도 음성을 남길지. 그 사람은 음성의 온기에 약하니까. 그러나 난 휴대전화에 감정을 담아 폴더를 탁 닫아 버렸다. 콜라를 빨아들이는 공기 소리가 시끄럽다.
“으~음.. 바람맞히는 건가...”
옆자리에 빈 종이컵을 내려놨다가 바람에 날아갈 뻔해서, 그걸 손에 쥔 채로 엄지손가락을 뻗어 이마를 긁적였다.
“표 비싼데...”
벤치에 등을 확 기대고 앉아 있다가, 유모차를 타고 앞을 지나가며 눈이 마주친 어린이에게 인사했다. 어린이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유모차가 지나가도 고개를 나에게 고정하고 있다가 다시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린이는 매정하다.
벌써 4시가 다 됐다. 그쯤 되면 지친 어린이들이 떼를 쓰기 십상이다. 난 아까처럼 벤치에 팔을 올린 자세로 한참 그런 어린이들을 지켜봤다. 아, 좋겠다. 나도 떼 쓰고 싶을 때 저렇게 앞뒤 가릴 것 없이 바닥에 누워버리고 싶다.
“아직도 안 받네.”
전화만 했는데도 배터리가 한 칸씩 닳아가고 있다. 총 5칸. 그에 대한 나의 인내심처럼. 아니. 난 배터리가 다 닳아도 기다릴 수야 있지만.
내가 멋쩍은 듯 티켓을 건넸을 때. 그는 나보다도 멋쩍게 웃으면서, 차마 거절하지 못해 겨우 받아들었다. 나에겐 오히려 그런 태도가 상처다. 그는 모를 테다. 배려의 태도가 상처가 되리라고는.
‘고마워. 그런데 그날은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늦어도 괜찮아요. 늦게까지 하잖아요, 유원지는. 마지막 퍼레이드가 8시니까 그것만 봐도 티켓값은 하죠,’
거절하려는 서두에 나도 모르게 말이 점점 길어진다. 신경도 안 쓸 테지만. 별로 특별한 사이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나름의 데이트 신청인데 선약이라니. 차라리 싫다고 해 주지. 그렇다면 마음을 접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그는 티켓을 쥔 채로 내 손을 잡아왔다.
‘기다릴 거야?’
‘네... 저는 선약 없으니까요.’
‘정말 기다릴 거야?’
‘네에. 정말 기다린다니까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약속 끝나면, 꼭 갈게.’
내가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 늘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 사이에 티켓을 끼워넣은 그가, 한걸음 더 다가와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자리를 떴다. 과연 올까. 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별로 일찍 오려나, 기대한 적은 없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전화를 너무 많이 한 거 아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메일을 남겨 둘까. 그건 너무 부채감을 주는 것 같기도. 아니, 부재중이 더 무거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내내, 내 앞을 지나가는 어린이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마주쳐 주었다. 기분이 좋은 어린이들은 나에게 인사를 되돌려 주었고 기분이 좋지 않은 어린이들은 이미 울고 있었다. 나도 그냥 울어버려? 엉?
유원지를 할 일 없이 빙빙 돌고 있는 등 굽고 음울한 표정의 남자라니. 얼굴이라도 호감상인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제트코스터에는 영 흥미가 없다. 공포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빙글빙글 도는 것에는 멀미한다. 그러니 유원지는 참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인데. 왜 티켓을 사 버렸을까.
왜 티켓을 사고 그에게 주었을까. 데이트하지 않을래요? 그렇게 말해버렸지만. 애초에 명확한 사이도 아니고. 어쩌면 그는 고백의 예감을 느꼈을지도. 나, 표정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아, 이제 걸어다니는 것도 지쳤다.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유원지의 지도가 눈앞에 커다랗게 다가왔다. 지도가 다가온 게 아니라 내가 다가간 거지만. 현위치를 표시해주는 빨간 점이 흡연실과 아주 가깝다. 이렇게도 걸었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죄다 지친 얼굴의 보호자들. 혹은 신난 채로 마주보며 한참을 떠들고 있는 커플. 나도 어떻게 보자면 커플인데. 한짝이 없는 것뿐이지만.
내 부재중을 봤을까. 그렇다면 전화를 다시 걸어올까. 아니라면 메일을 보낼까. 그것도 아니면 정말 약속을 지키러 올까. 슬슬 해가 떨어지고 있다. 난 재를 털면서 휴대전화를 다시 한 번 들었다. 진동으로 바꿔 둔 게 틀림없는데 아무 반응이 없는 게, 혹시 무음으로 해 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그러나 확실히 진동이었다.
난 다시 걸었다. 흡연실에서 나오자 담배냄새에 휩싸인 좀 더 우울한 얼굴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뛰어노느라 지친 어린이들을 안거나 업고 돌아가는 가족들이 늘어났다. 나와 스쳐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무심결에 코를 찡그렸다. 아, 이거 정말 미안하네요. 도게자라도 해 드려 버릴까. 그런 충동이 들었다.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저녁 퍼레이드는 8시. 폐장이 9시. 난 언제까지 기다릴까. 퍼레이드 중에 그가 와 버린다면 난 그와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인파들 사이에서 서로를 찾아낸다니, 열량을 너무 써야 하잖아. 다시 아까 전의 그 벤치로 돌아왔다.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아까 전과 똑같은 자세를 했다. 게임기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그런데 데이트라며 초대해 놓고 게임하면서 기다리면 뭔가 멋이 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주지 말 걸 그랬나.”
날 좋아해 달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 끈덕지게 매달리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셈 치고 사귀어 줄지도. 그러나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하니까. 그의 매끈한 면 안쪽을 좀 더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를 내내 쳐다보고 있었더니 이렇게 돼 버렸다.
아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바지 앞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기가 살짝 부르르 떨었다. 앗.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나도 모르게 촐싹대며 바지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그가 아니었다. 난 한쪽 무릎에 팔을 괸 채로 방금 온 메일에 답장했다. 한 손으로 버튼을 누르는 탓에 전화기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웃는 게 귀엽지. 그 자세 그대로 이번엔 전화기를 자켓 주머니에 넣으면서, 그대로 손을 찔러넣고, 그의 얼굴을 생각했다. 할 일을 제대로 하고 말야. 사람에게 무른 듯 차가운 듯. 잘 끊어내고 있는 거야? 어른이니까 알아서 하고 있겠지. 여러 소모임에도 착실히 얼굴 비춘다는 얘기는 들었어. 나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아서 그런 소식은 결국 한 다리 건너 들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끈기 있지 않거든, 난...
역시 생긴 걸로 자꾸 돌아오게 돼. 내면은 잘 알지 못하니까. 그걸 보고 싶어서 오늘 이렇게 초대했는데. 왜 고백한 내가 상처받지 않은 표정을 했고 거절한 그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을까. 정작 그는 아무 상관 없을 거고 실제로 좀 아픈 건 나인데. 그래도 엉덩이 만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엄청나게 아저씨가 된 것 같아... 뭐. 아저씨라고 할 나이인가. 그런가? 나, 그렇게 아저씨?
이젠 왜 좋아하게 됐는지도 알 수가 없어. 마치 알과 닭처럼. 우로보로스처럼 서로가 대가리를 물고 있는 상태인 거야. 만약 왜 좋아하는지 물어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도 내가 바라보는 거, 분명 다 알고 있을 건데...
그런 생각을 한없이 하다 보니 벌써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해졌다. 벤치 옆의 메리고라운드엔 조명이 화려하게 들어왔다. 그 앞의 나. 벤치에 앉아서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는 남자를 기다리는 또 다른 남자. 얼굴에 빛이 닿는 게 느껴지니 어쩐지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놀이기구들이랑은 다르게 좀 더 조용하고 차분한 노래들이 나오는 메리고라운드. 계속계속 돌아가는 말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말들. 난 그럼 어쩌면 메리고라운드의 이 말들이랑 같은 상태일지도 몰라.
누군가가 멀리에서부터 급하게 뛰어 오고 있다. 오호라. 누군가 또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 있었나 보네. 바람 맞히지 않기 위해서 저렇게 뛰어 오다니. 제법 정성이잖아. 메리고라운드에서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다들 퍼레이드의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 가 버린 거야. 이곳에서 뭔가를 기다리는 건 모두가 똑같군. 대상은 다르지만.
그러나 뛰어오고 있던 남자는 다름 아닌 내가 기다리던 그. 메리고라운드 앞에서 멈춰서서, 마치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무릎에 양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가다듬었다. 난 일어서 있을지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진짜 기다렸네.”
“늦었어요...”
“기다리다 돌아갔을 줄 알고. 그럼 아깝잖아.”
“여긴 사람들도 없고.”
“그러게. 다들 저쪽으로 가던데. 앗. 벌써 저녁 퍼레이드 시간인가?”
“그러게요. 그럴 수도.”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손목시계를 한번 쳐다보고는 내 손목을 낚아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틈새에 끼이고 싶지 않은데! 나는 그를 따라 어쩔 수 없이 달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퍼레이드는 시작되고 있다. 거대한 스피커들에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크게크게 울리고 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난 벅찬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사랑 알아요?”
시끄러운 틈에 그렇게 물었다.
“에?”
“사랑 아냐고!”
“사랑하냐고??”
“아니, 사랑, 아냐고!”
“사랑? 몰라!”
“그런데 왜 왔어요?”
“그런 거 알고서 오기엔 이미 너무 늦었었어.”
“난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밖에 안 했어요. 전화도 안 받길래 바람맞은 줄 알고. 아니, 사실상 바람맞은 거나 다름없지...”
“아! 온다!”
그는 내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퍼레이드를 쳐다보기에 이르렀다. 이봐. 그렇게 뛰어와 놓고서는. 내가 퍼레이드보다 뒷전이야?
“그렇게 불퉁하게 있지 말고. 일단 퍼레이드 볼래?”
“네에.”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에게 동참해 행렬에게 환호하거나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 보였다. 거대한 탈것 위에 올라탄 채로 재롱을 부리는 사람들도. 힘들게 기다려 좋은 자리를 차지했거나 뒤켠에서 시야가 가려지며 보고 있는 사람들도. 내 옆의 사람도. 전부 즐거워 보였다. 이곳에서 기뻐하지 않는 건 나뿐인가. 아냐, 따지자면, 나도 기뻐하고 있다. 그가 나를 위해 달려왔다. 바람맞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에 즐거워하고 있다. 어쩌면 바보 같아.
퍼레이드가 끝나자 사람들은 제각각 흩어져 갈 길을 갔다. 곧 폐장이라는 아나운스가 배경음악보다도 크게 들린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내 손을 또 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난 유원지에 온 건데! 운동하러 온 게 아니고! 그렇게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일단 한번 참았다. 그는 날 메리고라운드 앞에 데리고 가서야 멈춰섰다. 마지막으로 놀이기구를 타러 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난 그의 옆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미안. 갑자기 뛰어서.”
“왜 뛰었어요?”
“마지막으로 이거, 탈까?”
“왜요?”
“데이트라며? 아무것도 같이 안 하고 헤어지는 건 아깝잖아.”
“그러니까. 왜 메리고라운드?”
초대한 것도 나. 기다린 것도 나지만 괜히 공격적인 태도가 됐다. 그렇게 묻자 그는 눈썹을 팔자로 젖히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더니, 나에게 좀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야 니노가 여기서 나 기다렸으니까. 이거 타고 싶어서 기다린 거 아닐까 해서.”
“아아...”
메리고라운드에서 뿜어져나오는 거대한 불빛. 거대한 소리. 그걸 모두 등지고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하면서 눈썹을 들어올려, 나에게 탈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래. 어쩔 수 없어. 이렇게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거야. 이 사람 앞에만 서면, 난 자꾸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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